<책 읽는 여자>/ 김희업/ 1998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책 읽는 여자
책 읽는 소리 들린다
꿀처럼 달게 손끝에 침을 묻혀가며
책장을 넘기는 소리, 아니 거대한 나무를 넘기는 소리
쓰러지는 나무 몇 페이지 차곡차곡 그녀의 무릎 위에 쌓인다
달음박질치며 앞서가는 활자
놓치지 않으려고 그 뒤를 바싹 쫓는 숨 가쁜 그녀의 눈
그녀의 눈이 톡톡 튀며 책위로 굴러다닌다
방금전 중앙시장에서 그녀와 눈 맞은 생선
지하철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다
지금 그녀는 책 속에서 바다를 건너는 중이다
축축한 물기가 베어나는 그녀의 손
그녀가 있는 곳으로부터 지상에는 그녀의 남편이
서 있다 돌아가지 못하는 바다,
떨구고 온 비늘 생각에 부릅뜬 눈
철철 흘리고 온 바다를 내내 응시하는 생선의 눈
그녀는 잠시 바다에서 내려
바구니속 신문에 싼 생선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몇 시간 후면 책장처럼 희디흰 그녀의 손으로
바다는 구워지고 등이 가려운 생선은
자꾸 돌아누우려
석쇠위에서 몸을 뒤척일 것이다 비린 눈물을 피우며
처얼썩 철썩 파도가 우는 것 같아
이제 책장을 덮고 돌아서는 그녀의 중년이 반쯤 접힌다
빛이 빨려 들어가는 좁은 2번 출구를 그녀가
빠져나오고 있을 때 빛과 어둠의 경계는 더욱 뚜렷해진다
거울 속 그녀
한 권의 또 다른 책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책벌레처럼
[감상]
가끔 책을 읽다가 그 속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상상되는 풍경이 있습니다. 독서가 가져다주는 장점은 이처럼 독자가 능동적으로 탐구해가는 텍스트와의 연애 같다고 할까요. 책을 읽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이 시의 상상력은 소재의 근원을 쫓아가며 풀려집니다. <책장>의 근원인 나무로, 독서를 하는 <그녀의 눈>이 중앙시장의 생선의 눈으로, 책 속 의미의 이해가 <바다를 건너는 중>으로 이리저리 유영을 하듯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탄탄하게 읽히는 것은, 상상력의 연결고리가 개연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