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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치킨 - 이명윤

2008.02.04 18:10

윤성택 조회 수:1643 추천:130

「안녕, 치킨」 /이명윤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 2007년 『시안』으로 등단 / 《문장웹진》 2008년 2월호  


        안녕, 치킨

        이번엔 불닭집이 문을 열었다
        닭 초상이 활활 타오르는 사각 화장지가
        집집마다 배달되었다
        더 이상 느끼한 입맛을 방치하지 않겠습니다
        공익적 문구를 실은 행사용 트럭이 학교 입구에서
        닭튀김 한 조각씩 나눠 주었다
        아이들은 불닭집 주인의 화끈한 기대를
        와와, 맛깔나게 뜯어 먹는다
        삽시간에 매운바람이 불고 꿈은 이리저리 뜬구름으로 떠다닌다
        낙엽, 전단지처럼 어지럽게 쌓여가는 십일월
        벌써 여러 치킨 집들이 문을 닫았다
        패션쇼 같은 동네였다 가게는 부지런히 새 간판을 걸었고
        새 주인은 늘 친절했고 건강한 모험심이 가득했으므로
        동네 입맛은 자주 바뀌어 갔다
        다음은 어느 집 차례
        다음은 어느 집 차례
        질문이 꼬리를 물고 꼬꼬댁거렸다
        졸음으로 파삭하게 튀겨진 아이들은 종종 묻는다
        아버지는 왜 아직 안 와
        파다닥 지붕에서 다리 따로 날개 따로
        경쾌하게 굴러 떨어지는 소리
        아버진 저 높은 하늘을 훨훨 나는 신기술을 개발 중이란다
        어둠의 두 눈가에 올리브유 쭈르르 흐르고
        일수쟁이처럼 떠오르는 해가
        새벽의 모가질 사정없이 비튼다
        온 동네가 푸다닥,
        홰를 친다.

        
[감상
]

불닭집 오픈에서 비롯되는 시적 사유가 탄탄하게 전개된 시입니다. 대체로 소자본으로 창업할 수 있는 변두리지역의 가게는 빠듯한 돈 때문에 이런저런 사정이 겹치고 몇 개월 자금회전이 안 되면 폐업하기 일쑤입니다. '패션쇼 같은 동네'는 그래서 소시민적 음영을 긴 흐름에서 관찰한 직관입니다. 늦은 시각까지 격무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졸음으로 파삭하게 튀겨진 아이들'이나, 막막한 희망을 암시하는 '하늘을 훨훨 나는 신기술'은 발랄한 듯싶지만 실은 그 내면에는 소시민의 비애가 배여 있습니다. '온 동네가 푸다닥,/ 홰를 친다'의 마무리도 예민한 감각으로 핵심을 관통하는 우화적 상상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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