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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말 - 류인서

2008.02.28 17:31

윤성택 조회 수:1320 추천:115

「사물의 말」 / 류인서 (2001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 《미네르바》 2008년 봄호  



        사물의 말

        나는 빛을 모으는 오목거울이지
        자전거의 은빛 바큇살 사이에 핀 양귀비꽃
        세계와 세계 사이를 떨며 흐르는 공기
        회오리를 감춘 강물이지

        조용히 밤의 표면을 미끄러져 가는 유령들의 범선
        나비걸음으로 다가오는 폭풍우지
        땅의 중력을 거슬러 솟아오르는 새
        태양을 애무하는 파도의 젖가슴이지
        춤추는 방랑자지, 나는

        멀리 있는 별보다 더 멀리 있는 별
        네가 잡은 주사위의 일곱째 눈이지

        세계의 벽을 두드리는 망치, 나는 그 끝나지 않는 물음이지, 기다림이지
        아침을 향해 절뚝이며 달려가는 괘종시계
        발기하는 소경의 지팡이지, 날선 창끝이지

        네가 나를 들을 때,
        너의 눈이 나를 쓰다듬을 때,
        나는 너에게 덤빈다 먹어치운다
        먹으며 먹히며 너와 나는 서로 끝없이 스민다
        내가 너를 수태하고 네가 나를 낳는다

        너와 나, 마주하는 두 개의 사물
        사이에서 넘쳐흐르는 낯선 세계의 즐거운 멜로디


[감상]
사물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교통과 같습니다. 사물은 그래서 주위의 것들과 정체되기도 하고 일련의 방향성을 갖기도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 사물 속에 자리한 관념을 시의 흐름에 일치시키려는 통찰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단하고 정교하게 사물의 관계가 긴장하고 있다고 할까요. 시인은 그야말로 없어져 버린 과거, 보이지 않는 것들은 문자로 재생해야하는 운명인 것입니다. <너와 나, 마주하는 두 개의 사물>에서 낯섦을, 즐거움을 만끽하는 발랄함이 스펀지처럼 흡인력을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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