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장지 - 박판식

2001.10.09 13:59

윤성택 조회 수:1448 추천:247

『2001년 동서문학 신인상』/ 박판식 / 동서문학



            장지                                  
    
             입벌리고 잠든 아버지
    
             힘없이 누워 있는,
             사실 이미 그곳에 계시지 않는 할머니의 무덤 앞에서
             엉뚱하게도 감자 캐던 날들을 생각한다
             쭈글쭈글한 반쪽의 감자 대신
             산비탈에 할머니를 묻고
             플라스틱 도시락 그릇이며 젓가락을 파묻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온다
             꼭꼭 밟아도 검은 연기가 땅 위로 새어나온다
    
             집에 돌아와 처음으로 먹는 저녁
             (불쌍한 내 식욕을 부디 용서하길)
             기름 먹은 누런 봉지가 뜯겨지고
             노릇노릇 익은 통닭 한 마리가 지나간 신문에 눕혀진다
             아무 말 없이 통닭껍질에 묻은 활자를 뜯어내는 어머니
             지친 아버지의 턱이 아래위로 삐뚤삐뚤 움직인다
    
             경북 능금상자 하나를 겨우 채운 옷가지들
             팔다리 모양대로 잘 접은
             가벼워진 할머니의 영혼이 한 줌 연기로 사라진다
             나는 어떤 미풍이 할머니를 데려가는지 보고 싶다
    
             잠든 아버지의 입 속에서 감자 줄기들이 올라온다
             집을 뒤덮은 어지러운 줄기들이 받침대도 없이
             자꾸만 공중으로 올라간다

[감상]
시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시인의 구조물을 더듬으며 그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리고 유심히 화상처럼 덴 자국에 눈을 가져가 보며 아슴아슴 느껴봅니다. 이 시는 할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죽음과 삶의 알레고리를 느끼게 합니다. 특히 마지막 연 "잠든 아버지의 입 속에서 감자 줄기들이 올라온다"는 이 시의 탁월한 상상력입니다. 오랜만에 시를 읽으니 마음 속에도 비가 내리는 듯 싶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71 비 오는 날 사당동에서 총알택시를 타다 - 정 겸 2003.11.03 1044 167
1070 드라큘라 - 권혁웅 2004.01.08 1044 187
1069 수사 밖엔 수사가 있다 - 최치언 2002.05.20 1046 209
1068 소각장 근처 - 장성혜 2009.03.18 1047 110
1067 산딸나무 - 고현정 2003.04.28 1048 167
1066 가스통이 사는 동네 - 안성호 2004.01.02 1048 187
1065 술병 빗돌 - 이면우 [1] 2003.03.18 1049 176
1064 꽃 속의 음표 - 배한봉 2003.04.23 1049 187
1063 막돌, 허튼 층 - 이운룡 2004.12.07 1049 202
1062 알쏭달쏭한 소녀백과사전 / 흰벽 - 이기인 [2] 2003.08.29 1052 176
1061 석양리 - 최갑수 2002.05.23 1053 182
1060 마당의 플라타너스가 이순을 맞은 이종욱에게 - 이종욱 2005.03.21 1054 186
1059 거리에서 - 유문호 2002.12.31 1055 178
1058 때늦은 점심 - 이지현 [1] 2003.04.02 1055 158
1057 밤이면 저승의 문이 열린다 - 김충규 2003.07.05 1055 186
1056 포도를 임신한 여자 - 장인수 2003.08.12 1055 180
1055 댄스 파티 - 이정주 [1] 2004.06.16 1055 171
1054 2011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2011.01.04 1056 71
1053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 한혜영 2002.07.12 1058 176
1052 활엽수림 영화관 - 문성해 2003.04.08 1059 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