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산책> / 최승호/ 《문예중앙》 2006년 봄호
밤의 산책
집이 말뚝도 아닌데
벌써 집을 말뚝 삼아
나는 골목을 일곱 바퀴나 돌고 있다
밤의 골목은 텅 비었다
전봇대마다
범죄를 비추는 가로등이 있고
가로등 아래
환히 비춰봐야 쓰레기뿐인
쓰레기자루들이 모여 있다
뚱뚱한 쓰레기의 대가족
오늘 텔레비전에서 하마 시체를 보았다
뻥 뚫린 살가죽 속에서
독수리들이 내장을 꺼내 먹느라
머리가 피범벅이 되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무시무시한 경쟁의 풍경 속에서도
죽은 하마는 두엄더미처럼 무심했고
무슨 큰 바위처럼 엎드려 침묵했다
그 침묵은 지금
밤의 골목에 늘어선 텅 빈 차들에도 가득하다
나는 골목을 아홉 바퀴째 돌고 있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나도 숫자를 배웠다
거의 이만 번째 밤을 향해
홀로
영혼이 어두운 하마처럼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감상]
<골목>과 <하마>라는 두 소재가 한 편의 시에 녹아있습니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시인의 직관에서는 몽돌처럼 자연스럽게 섞이는군요. 이미지를 어렵지 않게 갈마쥐는 방식에서 연륜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