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눈길, 늪 - 이갑노

2006.03.29 16:44

윤성택 조회 수:1659 추천:248

<눈길, 늪> / 이갑노/ 2006년 《시인세계》 신인상 당선작 中


        눈길, 늪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늪으로 태어나 산다고
        처마 밑 풍경은 속삭여 주었지
        밤새 입에서 시작된 강은 꾸룩 소리를 내며 흘러갔어
        새벽에 일어나 보니 첫눈이 내렸어
        나는 아파트 옆길을 걸어가네
        나보다 앞서간 발자국 희미하게 찍혀 있네
        요구르트 리어카처럼 작은 수레를 끌고 간 발자국
        일렬로 길게 난 자전거와 사람의 발자국
        나는 새 길을 가다가도
        위험한 길에서는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네
        눈이 녹고
        길에는 그들의 발자국만 얼음조각으로 박혀 있어
        나는 신발 무늬를 보고
        그들이 누구인가를 짐작하네
        밤사이 하늘이 내게 내려와서 늪으로 변한 길을 덮고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었어
        새들이 날아가며 한번 입력된 길은
        유전자처럼 절대 지워지지 않아
        늪 속에도 길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어
        여행길이 죄다 입력되어 나중에 갈 수 있게
        바람의 발자국은 눈 위에 무늬처럼 남아
        눈길을 지워버렸어
        눈길은 밖으로 이어졌어, 늪으로


[감상]
<눈(雪)>과 <늪>의 관찰에서 비롯된 직관이 뚜렷합니다. <위험한 길에서는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네>에서는 따뜻한 연대감이 느껴집니다. <늪>은 강물에서 비롯되어 단절된 또 하나의 개체로서 존재합니다. <누구나 하나의 늪으로 태어나 산다>는 태어나기 이전 하나의 본류였던 강줄기에서 외떨어져, 제 스스로 땅과 소통하며 초원으로 굳어가는 과정이 아닐런지요. 눈이 녹아 다시 늪으로 스며들지라도 그 위에는 언젠가 누군가의 단단한 <길>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늪처럼 제 안에서 세상의 무늬를 침전시키며,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71 비 오는 날 사당동에서 총알택시를 타다 - 정 겸 2003.11.03 1044 167
1070 드라큘라 - 권혁웅 2004.01.08 1044 187
1069 수사 밖엔 수사가 있다 - 최치언 2002.05.20 1046 209
1068 소각장 근처 - 장성혜 2009.03.18 1047 110
1067 산딸나무 - 고현정 2003.04.28 1048 167
1066 가스통이 사는 동네 - 안성호 2004.01.02 1048 187
1065 술병 빗돌 - 이면우 [1] 2003.03.18 1049 176
1064 꽃 속의 음표 - 배한봉 2003.04.23 1049 187
1063 막돌, 허튼 층 - 이운룡 2004.12.07 1049 202
1062 알쏭달쏭한 소녀백과사전 / 흰벽 - 이기인 [2] 2003.08.29 1052 176
1061 석양리 - 최갑수 2002.05.23 1053 182
1060 마당의 플라타너스가 이순을 맞은 이종욱에게 - 이종욱 2005.03.21 1054 186
1059 거리에서 - 유문호 2002.12.31 1055 178
1058 때늦은 점심 - 이지현 [1] 2003.04.02 1055 158
1057 포도를 임신한 여자 - 장인수 2003.08.12 1055 180
1056 댄스 파티 - 이정주 [1] 2004.06.16 1055 171
1055 밤이면 저승의 문이 열린다 - 김충규 2003.07.05 1056 186
1054 2011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2011.01.04 1056 71
1053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 한혜영 2002.07.12 1058 176
1052 활엽수림 영화관 - 문성해 2003.04.08 1059 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