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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대 - 심보선

2008.05.27 18:17

윤성택 조회 수:1842 추천:175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1994년 『조선일보』로 등단) / 《문학과지성사》시인선 (2008)


  삼십대

  나 다 자랐다, 삼십대,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 가끔 눈물이 흘렀으나 그것을 기적이라 믿지 않았다. 다만 깜짝 놀라 친구들에게 전화질이나 해댈뿐, 뭐 하고 사니, 산책은 나의 종교, 하품은 나의 기도문, 귀의할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 공원에 나가 사진도 찍고 김밥도 먹었다, 평화로웠으나, 삼십대, 평화가 그리 믿을 만한 것이겠나, 비행운에 할퀴운 하늘이 순식간에 아무는 것을 잔디밭에 누워 바라보았다, 내 속 어딘가에 고여 있는 하얀 피, 꿈속에, 니가 나타났다, 다음 날 꿈에도, 같은 자리에 니가 서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너랑 닮은 새였다(제발 날아가지 마), 삼십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산책에서 돌아오면 이 텅 빈 방, 누군가 잠시 들러 침만 뱉고 떠나도, 한 계절 따뜻하리, 음악을 고르고, 차를 끓이고, 책장을 넘기고, 화분에 물을 주고, 이것을 아늑한 휴일이라 부른다면, 뭐, 그렇다 치자, 창밖, 가을비 내린다, 삼십대, 나 흐르는 빗물 오래오래 바라보며,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
 

[감상]
더 이상 살 속의 뼈가 아프지 않게 자라지 않는 나이. 삼십대는 누구든 거쳐야 하고 또 누구든 머물다갔던 시간입니다. 삼십대가 되면 종종 상실감에 젖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희망의 오류를 인정해야 할 시기는 아닌지요. 이 시를 읽다보면 텅 빈 오후 세시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는 감정을 겪어내고 그 후유증까지 앓아본 소회와도 같으나, 여전히 삶은 시간에 대한 경배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는 것. 삼십대의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고 바라기 때문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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