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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 - 신기섭

2006.05.29 17:56

윤성택 조회 수:1871 추천:243

《분홍색 흐느낌》 / 신기섭/ 《문학동네》시인선  


          죄책감

           느낌이 왔다
           등을 구부리고 앉아 떡을 먹는데 등에 담(痰)처럼 박힌 느낌,
           느낌을 보내려고 저 이화령(梨花嶺)의 병꽃나무를 바라보았으나
           거기 붉은색에 버무려져 뜨겁게 파닥대는 느낌, 추억처럼
           다시 돌아와 한 사람의 모습으로 커지는 느낌; 그는
           병든 사람이다 팔뚝의 주사자국들은 미친 별자리 같다
           등을 구부리고 한 그릇 국수를 말아먹는 그는
           지금 내 등에 박힌 느낌, 그는 이빨이 다 빠졌고
           안타깝게 면발을 놓치는 잇몸 사이로 하얀 혀가
           넌출같이 흐느끼는 소리 어두운 방에서 혼자
           그는 죽은 사람이다 더러운 요에 덮여, 지금 이 봄날
           담(痰)처럼 내 등에 박힌 몸, 점점 내 등은 구부러졌으나
           저기 병꽃나무의 붉은 품속에서 잠깐 잠깐씩
           하얗게 병꽃나무를 늙게 하는 봄볕같이
           나를 따뜻하게 늙게 하는 죽은 몸, 죽은 환한 몸,
           내 몸에 겹쳐졌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느낌이 몸처럼 왔다 가는 것이었다 날마다
           그렇게 끈질기게 나를 찾아오는 몸이 있다
           이제야 그 몸을 사랑하였다


[감상]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이지만 늘 불길하고 두렵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그 자체로 강렬한 상징입니다. 젊은 시인의 죽음을 전제로 시집을 읽기란 쉽지 않습니다. 피처럼 붉은 시집 곳곳 삶과 삶에서 마주치는 예감으로 인해 자꾸만 서늘해지곤 합니다. 시집 맨 마지막에 실린 이 시는 빙의현상을 연상케 하는군요. <내 몸에 겹쳐졌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느낌>에서 소름이 돋듯 울림이 전해집니다. 젊은 나이에 이런 직관을 가지게끔 만든 그의 현실은 어떤 것이었을까. <끈질기게 나를 찾아오는 몸>을 알아가기까지 그는 깊고 차가운 의식의 심연까지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에게 <사랑>이란 살아 있음의 현상이 아니라 죽음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극도의 체험이며 삶의 또다른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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