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구름 편력 - 천서봉

2011.02.01 16:11

윤성택 조회 수:1137 추천:128


<구름 편력>/  천서봉 (2005년 『작가세계』로 등단) / 《문학수첩》2007년 가을호

          구름 편력

        셀 수 없는 구름들을 나는 지나왔으니,
        서해 어디쯤이거나 차가운 사막의 귀퉁이쯤이 태생이었을
        구름의 먼 행보는 모르는 것으로 한다.
        석 달 열흘 동안 먹장구름이 눈물로 떠나지 않았다거나
        나와 어느 달콤한 오월의 구름 사이에
        보름달 같은 아이가 자란다는,
        뜬소문들이 연기처럼 자라나 헐한 저녁을 짓곤 했다.

        그러나 이제 시월,
        하늘은 생각의 고도(高度)를 조금 높인다. 실상은 늘
        비가 되어버린 구름의 후일담 같은 것.
        나는 구름을 위해 몇 편의 시를 짓거나
        시절의 아름다운 증거를 사진 속에 가두었으나
        대부분 먼 배경이었으며 알고 보면
        구름 모자들이 한번쯤 쓰윽 나를 써보고 간 것뿐이었다.
        뒤를 삶이 들러리처럼 걸었으니,
        변덕스럽고 지독했던 체위가 내 이력의 전부였구나.
        내가 가졌던, 그러나 위독했던 한 떼의 구름들,
        그녀들이 알선해 준 내 몽상의 일터엔
        한 줄로 선 토끼나 양떼들이 슬픈 톱니바퀴를 돌리고 있다.
        구름이 나를 망쳤다.

        너무 많은 하늘이 나를 스쳐지나 갔다.


[감상]
구름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하늘의 지형입니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은 점점 사라지는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름’은 이 시에 있어서 추억과 기억을 조응케 하는 가시 대상이자, 그 모든 것들의 형태이며 이미지입니다. 저녁, 눈물, 사진… 이러한 편린이 있었던 그날에도 구름은 있었고, 어쩌면 그 하늘을 올려다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사라진 구름, 그 세계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돌이켜 보건데 인생은 귀향을 꿈꾸는 여행이 아닐 것입니다. 구름이 나를 망치고, 너무 많은 하늘이 나를 스쳐간 것은, 이렇게  편력(遍歷)이 나를 길들여 왔기 때문은 아닌가 싶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71 모과 1 - 유종인 2007.07.25 1267 128
1070 성에 - 김성수 [1] 2007.12.04 1481 128
1069 무애에 관한 명상 - 우대식 2008.01.31 1238 128
1068 신문지 한 장 위에서 - 송재학 [2] 2008.07.01 1616 128
1067 별이 빛나는 밤에 - 장만호 2008.11.26 1829 128
» 구름 편력 - 천서봉 [1] 2011.02.01 1137 128
1065 겨울 모스크바 편지 - 김성대 [1] 2011.02.11 1789 128
1064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1 - 이성복 2007.08.08 1212 129
1063 지네 -조정 [3] 2007.08.10 1260 129
1062 자폐, 고요하고 고요한 - 최을원 2009.12.15 949 129
1061 어떤 전과자 - 최금진 2007.10.23 1200 130
1060 안녕, 치킨 - 이명윤 [2] 2008.02.04 1643 130
1059 저니 맨 - 김학중 2010.02.04 1480 130
1058 버려진 - 최치언 2011.03.11 1355 130
1057 인용 - 심재휘 2008.11.10 1530 131
1056 고백 - 남진우 2009.11.27 1144 131
1055 붉은 염전 - 김평엽 2009.12.10 954 131
1054 모자 - 김명인 2011.03.08 1494 131
1053 수화 - 이동호 [2] 2007.07.19 1266 132
1052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 박제영 [1] 2008.03.12 1618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