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크래커 - 김지녀

2008.01.18 17:25

윤성택 조회 수:1211 추천:125

「크래커」 / 김지녀 (2007년 『작가세계』로 등단) / 《문장웹진》 2007년 10월호  


        크래커

        수백 개의 다이너마이트를 준비하고
        폭파 전문가들은 콘크리트 벽에 뚫릴 구멍에 대해
        토론을 시작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나는 그들과 함께 폭파 직전의 건물을 보고 있다
        날씨는 쾌청하고
        기온도 적당하다
        크래커는 바삭바삭 잘도 부서진다
        건물은 아직 그 모습 그대로 담담하게 서 있다
        이미 깊고 큰 구멍의 뼈를 가지고
        천천히 무너졌을 시간이 늙은 코끼리처럼
        도시 한복판에 머물러 있다
        까맣고 흰 얼굴들이 차례차례 지나간다
        여러 번 크고 작은 눈빛이 오고 간다
        벌컥벌컥 물 한 컵을 마시는 동안,
        아무렇지 않게 무릎을 꿇어버린
        벽과 창문과 바닥이
        하늘 높이 솟았다 가볍게 흩어진다
        방바닥에는 크래커 부스러기들이 잔뜩
        떨어져 있다
        저 먼지구름은 이제 곧 이곳을 통과할 것이고


[감상]
크래커에는 반드시 구멍이 있습니다. 과자를 구울 때 구멍이 없으면 크게 부풀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크래커와 철거용 건물폭파를 절묘하게 중첩시켜 놓습니다. 건물에 대한 이와 같은 공법을 ‘발파해체공법’이라 하는데 분진이나 소음이 장기화되는 것을 방지하며, 건물 곳곳 뚫어놓은 구멍에 화약을 터트려 중력으로 붕괴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크래커도 구멍이 없다면 잘 부서지지 않겠지요. 크래커를 조각낼 때 <벽과 창문과 바닥이/ 하늘 높이 솟았다 가볍게 흩어진다>는 것, 전혀 다른 두 소재를 하나의 틀에 잇대어 놓는 것만으로도 이 시는 시적 성취를 이룹니다. 대상에 대한 명징한 포착과 이미지화가 제대로 이뤄지면 첫째는 세련미가, 둘째는 탁 트인 감응이 읽는이의 시선을 통과합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51 오래전에 잊은 이의 눈썹 - 허수경 [2] 2011.03.15 1813 146
1050 선풍기 - 조정 [1] 2005.01.25 1807 178
1049 민들레 - 이윤학 2001.06.13 1803 285
1048 제기동 블루스·1 - 강연호 [2] 2001.04.10 1800 283
1047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 최금진 2001.12.03 1795 207
1046 아직은 꽃 피울 때 - 하정임 2004.08.19 1792 197
1045 첫사랑 - 진은영 [2] 2001.09.11 1792 190
1044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 김경주 [1] 2006.08.17 1791 196
1043 겨울 모스크바 편지 - 김성대 [1] 2011.02.11 1788 128
1042 벽 - 유문호 [1] 2006.04.25 1786 219
1041 가방, 혹은 여자 - 마경덕 [2] 2005.12.10 1785 217
1040 안녕 - 박상순 [4] 2007.06.20 1784 139
1039 이 골목의 저 끝 - 정은기 2009.04.09 1781 123
1038 나무에게 묻다 - 천서봉 2001.06.11 1781 327
1037 어느 날 문득 - 김규린 2001.08.14 1779 232
1036 저물어가는 강마을에서 - 문태준 [1] 2005.05.06 1777 221
1035 감나무가 있는 집 - 김창균 [2] 2005.09.28 1775 222
1034 사랑 - 김상미 2003.08.14 1772 161
1033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 여림 [1] 2003.11.24 1770 204
1032 흙의 건축 1 - 이향지 2015.05.11 176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