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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명창 - 장석주

2008.01.25 17:32

윤성택 조회 수:1123 추천:136

『절벽』 / 장석주 (1975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 《세계사》  


  귀명창

  마당 가장자리에 풀들이 은성하다. 바랭이, 명아주, 달맞이꽃, 강아지풀, 쇠뜨기, 비름, 환삼덩굴들이 연합전선을 펼치며 마당을 노리고 있다. 며칠을 소강상태로 관망하는데, 풀들의 기세가 등등하다. 마침내 풀들의 침공이다. 정토 습격이다. 맹하 대공세다. 이 영토 분쟁에 휘말린 나는 땡볕 아래서 풀을 벤다. 백병전이다. 적들의 저항은 미약했다. 손과 팔등을 약간 긁혔을 뿐. 낫에 베여 넘어진 희생자들을 거둬 한쪽에 쌓는데, 풀 비린내가 진동한다. 승리를 낙관했으나 오판이다. 오산이었다. 비 온 뒤 풀들이 일어섰다. 풀들은 다시 마당을 호시탐탐 노렸다. 풀들은 다시 일어섰다. 나도 또다시 낫을 들었다. 풀은 저항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쓰러진다. 여름 내내 전쟁을 치르며 나는 지쳐갔다. 무법한 환삼덩굴이 허공을 더듬으며 마당의 정세를 염탐한다. 달맞이꽃 포병들이 펑펑 노란꽃망울 대포를 쏘았다. 쇠뜨기 보병들이 인해전술로 밀고 온다. 저 밀려오는 푸른 것들의 공세를 이길 수는 없다. 저 맹렬함에 나는 굴복한다. 패전의 침울함으로 어둠이 마당을 밟을 때, 풀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 풀들이 울다니! 나는 귀명창인 듯 엎드려 귀를 내놓고 풀들의 초록 언어로 된 시를 엿듣는다. 풀들이 운다. 풀들의 울음소리가 허공을 전면적으로 밀며 온다. 섬돌에 서서 풀들의 명음(名吟)이나 들으며 여름을 난다. 나는 기어코 귀명창이 되겠다!


[감상]
봄여름 내내 자라는 풀들과, 이를 베어내려는 화자의 노력이 <영토 분쟁>이라는 형상화로 어우러집니다. 간결한 문장의 흐름은 마치 빠르게 치고 빠지는 전술처럼 속도감 있게 전개되어 흥미진진합니다. 더 나아가 의인화로 그치지 않고 <귀명창>으로 귀결되는 의미의 확장 또한 시의 깊이를 더하게 합니다. <귀명창>이란 뜻 그대로 판소리를 듣는데 있어 수준 있는 지식과 이해를 바탕으로 감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귀명창의 능력은 주제의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소리꾼의 열정을 북돋는 맞장구 ‘추임새’에서 빛이 납니다. 허공을 전면적으로 밀고 오는 <풀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 아니 그 소리에 완전한 추임새를 넣고 싶은 사람… 이 시는 이렇듯 인간과 자연을 초월해 내면의 진정성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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