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이 골목의 저 끝 - 정은기

2009.04.09 15:24

윤성택 조회 수:1781 추천:123

  
<이 골목의 저 끝> / 정은기 (2008년 『한국일보』로 등단) / 《다층》2009년 봄호  

        이 골목의 저 끝

        모과나무 밑에서 그리워하는
        이 골목의 저 끝으로 나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저 끝에는 이곳과 다른 계절이 머물고
        시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숨겨둔 여울을 지나 흘러간다
        그곳에 닿으면 라디오 디제이에게 편지를 쓰겠다
        양탄자처럼 음악을 타고 날아갈 수 있도록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나는 기회를 엿본다
        지문들이 서로 엉키어
        빨판처럼 담을 타고 벽을 넘어 갈 때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가지를 드리울 것이다
        모과를 주렁주렁 매달고
        이 골목의 저 끝까지 모과향 날려 보내리

        갈비뼈를 따라 지퍼를 열자 뼈들이 솟는다
        몇 해 전 가을에 이곳에 섰지만
        담장 너머로 열매를 떨어뜨려 본 적
        한 번도 없으니, 땅 속으로 뿌리를 뻗어도
        이 골목의 저 끝에는 닿을 수 없으니
        슬픔에 찬 옹이가 목구멍으로 올라오면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멀리 뱉어 버린다
        온몸을 흔들어도 닿을 수 없는
        이 골목의 저 끝으로


        
[감상]
모과의 향기는 이 골목의 저 끝으로 갈 순 있어도, 모과나무는 일생을 한 곳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시에서의 ‘나’는 모과나무일수도 모과나무를 바라보는 또 다른 화자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되든 이 골목의 저 끝으로 가고 싶은 열망은 이 시의 주된 정조입니다. 나무의 의인화가 곳곳에 겹쳐지면서, 나무인 듯 사람인 듯 그렇게 그리움이 깊어집니다. ‘손가락’, ‘갈비뼈’, ‘목구멍’은 몸의 구성이지만 모과나무를 이해하는데 바쳐지는 수사들입니다. 너무 쉽게 읽히지도 그렇다고 난해하지도 않은 그 중간에, 알싸하게 시고 떫은 감각이 있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51 오래전에 잊은 이의 눈썹 - 허수경 [2] 2011.03.15 1809 146
1050 선풍기 - 조정 [1] 2005.01.25 1807 178
1049 민들레 - 이윤학 2001.06.13 1803 285
1048 제기동 블루스·1 - 강연호 [2] 2001.04.10 1800 283
1047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 최금진 2001.12.03 1795 207
1046 아직은 꽃 피울 때 - 하정임 2004.08.19 1792 197
1045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 김경주 [1] 2006.08.17 1791 196
1044 첫사랑 - 진은영 [2] 2001.09.11 1789 190
1043 겨울 모스크바 편지 - 김성대 [1] 2011.02.11 1787 128
1042 벽 - 유문호 [1] 2006.04.25 1786 219
1041 가방, 혹은 여자 - 마경덕 [2] 2005.12.10 1785 217
1040 안녕 - 박상순 [4] 2007.06.20 1784 139
» 이 골목의 저 끝 - 정은기 2009.04.09 1781 123
1038 나무에게 묻다 - 천서봉 2001.06.11 1781 327
1037 어느 날 문득 - 김규린 2001.08.14 1779 232
1036 저물어가는 강마을에서 - 문태준 [1] 2005.05.06 1777 221
1035 감나무가 있는 집 - 김창균 [2] 2005.09.28 1775 222
1034 사랑 - 김상미 2003.08.14 1772 161
1033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 여림 [1] 2003.11.24 1770 204
1032 흙의 건축 1 - 이향지 2015.05.11 176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