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의 신데렐라」/ 이지현/ 『시작』2003년 가을호
장례식장의 신데렐라
애인의 조문을 따라
한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그를 기다린다
나는 초대받지 않은 신데렐라
자정의 주차장은 낯설고 난폭하다 아니
어둠에게 모든 빛은 폭력적이다
완강히 차창을 잠그고
저 묵언의 세계 속에 서성이는
가로등과 낯선 남자들을 본다 삼베 완장을 두른 이가
깊게 깊게 담배 피는 것을 본다
일렬로 선 검은 차들 사이로
우주의 비밀스러운 찰나가 스쳐간다 왕자가
오기 전에 손을 내민 건
언제나 운명보다 먼저 다가온 두려움이었다
죽은 시간들이 다가와 차창을 두드리지만
나는 열지 않는다 차창에 낀 손가락이 머리칼을 당기고
이 헛된 망상이 헛되다면
헛되지 않은 순간은 무엇일까 자욱한 앞날과 불시에 다가오는
죽음들, 혹은 이 찬란한 파티장의 뒤꼍,
버려진 유리구두
애인은 오지 않는다
백 년쯤 늙어버린 신데렐라는 시동을 켠다
[감상]
장례식장에 들어간 애인을 기다린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상황을 '신데렐라' 동화에 연결시킨 점이 신선합니다. 삶과 죽음을 이성과 동화의 세계를 넘나들며 존재에 대한 직관으로 보여줬다고 할까요. 설득력 있는 상황과 그리고 덧대어진 상상력, '백 년쯤 늙어버린 신데렐라'가 그래도 아름다운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