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 심재휘 (1997년 『작가세계』로 등단) / 《랜덤하우스》(2007)
넘버나인에서의 하룻밤
그해 겨울로 시작하는 모든 변명은
넘버나인에서의 하룻밤 같은 것이다
붉은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손금을 헤아리거나
열 손가락 사이의 깊은 저편에 몸을 묻고 싶을 때
우르르 몰려갔던 그곳 영동선 철길 옆의
낮고 푹신하였던 넘버나인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밤새 눈이 내렸던 그날 밤
제법 쌍쌍이 앉아 수많은 신청곡을 적어냈지만
내가 바라던 연애만은 끝내 흘러나오지 않아서
어디론가 떠나가던 새벽 기차 소리를 들으며
넘버나인 찌직거리던 네온사인 간판 아래
그녀는 희미해져갔다
이미 오래전에 문 닫은 넘버나인
그 입구의 가로등 불빛에 대해서
망설임에 관하여 눈이 내렸지만
눈 내리는 날들은 모두 그녀 같았다
눈을 뭉쳐도 꼭 쥔 주먹이 되지 않아서
힘껏 던질 때마다 멀리 가지 못했다
세상의 모든 연애처럼 인생은 인생의
몇 걸음 전에서 필경 흩어질 뿐이다
그러니까 겨울 골목보다도 춥고 길던
너무나 어둡던 그 밤의 문들을
나는 왜 쾅 닫지 못하고 떠나온 것일까
넘버나인에서의 하룻밤은 길기도 하다
[감상]
추억 속 음악다방은 여전히 성업 중입니다. DJ의 굵은 저음의 목소리, 회전하는 LP판처럼 아스라해지는 현기증. DJ에게 읽히기 위해 직유와 은유를 동원했던 사연들, 용케 그 분위기를 겪었던 80년대 말 고교생 입장에서는 참 행복한 때였지요. 추억에 눈이 내리는 이 시를 읽다보면 어느덧 내 안의 잊지 못할 어느 겨울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연애처럼 인생은 인생의/ 몇 걸음 전에서 필경 흩어질 뿐>입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이렇듯 따뜻한 추억의 온기입니다. 지하 1층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저녁놀이 억새를 붉게 물들이는 풍경, 벤츠 버스 좌석을 그대로 뜯어다 몸을 깊숙이 내맡길 수 있도록 만든 의자들, 진공관 앰프와 스피커로 거침없이 흘러넘치는 음악이 넘버나인에 있었습니다. 그곳은 강릉이어도 좋고 대천이어도 좋고 당신의 마음 속이어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