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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연탄] - 이기인

2002.11.05 11:11

윤성택 조회 수:1066 추천:172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연탄] / 이기인/ 『현대시학』(2002.1월호)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 연탄


        아침 콩나물국이 끓자 나는 뒤섞인 젓가락 짝을 맞추고

        어머니는 밤새 불덩이와 같은 연탄을 들고 나와 부엌칼로 불덩이와 불덩이를 잘랐다
        기적처럼 떨어져 나온 그 연탄을 집어다 집 앞에 탑처럼 쌓아 올렸다

        키가 좀더 컸으면,
        비뚤어진 아버지의 문패를 바로 잡았을 것이고
        고드름을 따다가 개에게 고양이에게 사탕이다! 거짓말도 제법 했을 것이다

        나는 쥐가 긁어놓은 비누를 보다가, 간밤의 얼굴을 씻었다
        ―오늘은 아주 두껍고 소중한 책을 사야해요,

        연탄광 속에서
        표지가 검은 성경책을 연탄집게로 들고 나오시는 어머니
        성경책에 불이 붙었다하면, 부엌칼로 다음 페이지를 떼었지요,


[감상]
연탄세대라고 해야하나요, 적당히 시대를 지나온 분이라면 연탄 구멍 맞추는 것이 얼마나 코끝을 시큰거리게 하는지 알 것입니다. 이 시를 읽으면 어린 화자의 신선한 마음과 동화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시란 이런 것이다,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 상식적으로 삶을 살아온 나에게, 도무지 상식하지 않으면 세상은 얼큰한 콩나물국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이미 기억이 지나쳤으니 국민학교 2학년 어느 봄, 내가 아득히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잃어버렸던 과거들. 코흘리개 멍청했던 내가, 나를 다시 되찾기까지 그 먼 시간을 묵묵히 동행했던 붙이고 또 붙였던 두터운 일기장들. 글쎄 나를 눕게 하고 상처로 들러붙은 나를, 열정의 윗부분만 남도록 지긋이 눌러 떼어냈던 연탄집게. 나는 아마 그렇게 떨어져 나온 모양입니다. 연탄집게로 맞아본 사람은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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