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꽃 피울 때 / 하정임/ 2004년《시인세계》신인당선작 中
아직은 꽃 피울 때
막을 길이 없다
무더기로 벌어지는 꽃들의 붉은 말이며
저 팔짱을 끼고 피어나는 개나리의 섣부른 외출이며
서로 몸 섞으며 둥글어지는 거친 자갈들의 울음이며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흐르는 강물들의 조바심이며
아직 깨어나지 못한 번데기 속 나비 날개의 분주함이며
비를 내린다고 하늘을 쑤셔대는 새들의 상처난 부리며
아카시 등걸 사이로 새 집을 짓는 개미턱의 연약함이며
막을 길이 없는 것들아
빈방 주인을 기다리는 먼지의 애절함같은 것들아
사랑하는 애인의 속눈썹 위에서 떨고 있는 것들아
아직은 꽃 피울 때
아침에는 눈 내리고 저녁에는 봄비 상처난 부리 닦아준다
[감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자연의 움직임들을 이 시는 카메라와 같은 눈으로 포착해냅니다. '자갈'의 거친 면을 '몸 섞으면 둥글어'진다는 발상도 그렇고, '비 내린다고 하늘을 쑤셔대는 새들의 상처난 부리'가 그렇습니다. 객관적 위치에서 오랫동안 앵글을 움직이지 않고 들여다본 인과의 발견이랄까요. 결국 '막을 길이 없다'는 부정형은 '아직은 꽃 피울' 수 있다는 강한 긍정으로 희망적 결말을 도출해냅니다. 당선소감처럼 '말할 수 없음으로 말해야 하는 그 사이'에 늘 詩가 깃들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