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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 원동우

2002.01.10 12:41

윤성택 조회 수:1197 추천:205

이사 / 원동우 /1993 세계일보 詩당선작


             이사          


        아이의 장난감을 꾸리면서
        아내가 운다
        반지하 네평 방을 모두 치우고
        문턱에 새겨진 아이의 키눈금을 만질 때 풀석
        습기찬 천장벽지가 떨어졌다

        아직 떼지 않은 아이의 그림 속에
        우주복을 입은 아내와 나
        잠잘 때는 무중력이 되었으면
        아버님은 아랫목에서 주무시고
        이쪽 벽에서 당신과 나 그리고
        천장은 동생들 차지
        지난번처럼 연탄가스가 새면
        아랫목은 안되잖아, 아, 아버지

        생활의 빈 서랍들을 싣고 짐차는
        어두워지는 한강을 건넌다 (닻을 올리기엔
        주인집 아들의 제대가 너무 빠르다) 갑자기
        중력을 벗어난 새떼처럼 눈이 날린다
        아내가 울음을 그치고 아이가 웃음을 그치면
        중력을 잃고 휘청거리는 많은 날들 위에
        덜컹거리는 서랍들이 떠다니고 있다

        눈밭에 흐려지는 다리를 건널 때 아내가
        고개를 돌렸다, 아참
        장판 밑에 장판 밑에
        복권 두 장이 있음을 안다
        강을 건너 이제 마악 변두리로
        우리가 또 다른 피안으로 들어서는 것임을
        눈물 뽀드득 닦아주는 손바닥처럼
        쉽게 살아지는 것임을

        성냥불을 그으면 아내의
        작은 손이 바람을 막으러 온다
        손바닥만큼 환한 불빛  



[감상]
신파는 삶을 감동으로 연결하는 퓨즈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성냥불을 그으면 아내의/ 작은 손이 바람을 막으러 온다/ 손바닥만큼 환한 불빛" 아내가 느끼는 삶을 이처럼 감명 깊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사짐차 뒤칸일지도 모를 그 곳에서, 바람을 막으러 오는 행위. 삶은 이처럼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을 진하게 느끼게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자아에 대한 실험적인 시나 관념적인 시보다는, 이렇게 읽으면 가슴이 따뜻한 시가 좋습니다. 울림이 있어야 진정한 시가 되는 것처럼, 이 겨울 따뜻한 사람들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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