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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암에서 서쪽 - 박주택

2002.09.24 14:27

윤성택 조회 수:1086 추천:240

음암에서 서쪽/ 박주택 /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음암에서 서쪽


        바퀴자국이 남아 있는 오후
        도난당한 열쇠들이 떠 있다
        구름이 이발소의 누렇게 바랜 간첩신고
        벽보를 더듬고 있다 포플러나무 아래
        뻣뻣한 양철 조각이 일어서고 있다
        저 집이다 저때는 네 몸에 반점이 없었다
        닭이 홰를 치고 생쥐가 풀섶에서 변을 볼 때
        너는 포플러나무 아래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가 흐린 안경을 닦으며 말했다

        구름이 흘러가고 있다 숨을 죽이며
        새가 서쪽으로 날아갔다 깃발이 나부꼈다
        느릿느릿 시간이 흘렀다
        다시 흐려진 안경을 닦았다 바람이 불었다
        이끼 낀 발로 뻣뻣한 양철 조각이 밟히고
        오톨도톨 수술자국 남아 있는 가슴으로
        깨꽃이 피었다
        어디선가 방어 굽는 냄새가 났다
        저 포플러나무는 네 아버지가 심었다
        네 골짜기에 있는 포플러나무의 잎사귀를 봐라
        그건 힘줄이다

        서쪽 하늘에 되새 떼들이
        몰려왔다 트럭이 달려오다 먼지 속으로 뿌옇게
        사라져갔다
        어스름이 깔렸다
        별이 거무스름한 열쇠 위에서 반짝였다
        안이 환한 버스가
        흙 속에 발을 뻗는 옥수수 곁을 스쳐
        서쪽 등성이로 사라져갔다



[감상]
시인의 고향 풍경입니다. 흐린 안경을 닦는 어머니의 움직임과 함께 그곳의 정경들이 한눈에 다가옵니다. 이처럼 이 시는 시각 및 후각 등 감각이 뛰어난 시입니다. 누구나 고향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잊지 말아야할, 아니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겠고요. 해질 녘 안이 환한 버스, 지금 그 불빛을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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