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이발소 그림 - 최치언

2006.01.18 16:36

윤성택 조회 수:1632 추천:236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 / 최치언/  문예중앙 시인선


        이발소 그림

        항구는 제 발바닥을 개처럼 핥고 있다 그곳에서
        사내는 청춘의 한때를 비워냈다

        높다란 마스트에 올라 바다가 밀려오고 나가는 날들을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주파수로 고정했다

        깊고 질퍽한 검은 장화의 날들이었다 아낙네의 치마는 바람에
        돛을 키웠다

        한가한 골목마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고무다라 속에
        들어앉아 헤엄을 쳤다

        용궁다방 찻잔들이 배달되고 사내는 더운 잔을 후룩 들이켰다
        제 손금의 마지막 잔금을 탈탈 털어 마셨다
        귓전에서 거대한 파도가 부서졌다

        비탈진 둔덕에
        염소를 키우고 밤새 비린 생선의 배를 따며
        둔치의 허연 가시 속에서 파랑주의보를 지도처럼 펼쳐들고
        그날 죽었던 친구와 영원히 이곳을 떠난 여자에게
        양양전도한 뱃길을 열어주고 싶었다

        아무도 전도하지 못한
        부두의 교회당 목사는 방파제 끝에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 뒤로 허옇게
        뒤집어진 눈깔로 바다는 맑은 하늘 아래서 제 몸의 상처를
        꿰매고 있었다

        오늘도 사내는 마스트에 오른다 용서받지 못할
        꿈을 꾸는 머리는 항상 다리를 따라가기 마련이다고
        배의 선수가 선미 쪽으로 뱅뱅 돌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는
        주검처럼 평화로웠다


[감상]
이발소에 걸려 있는 그림은 서민역사 한 부분으로서의 상징입니다. 그곳에 걸려 있다는 그 자체가 단순히 유치한 저가 그림이라기보다는, 서민 정서와 의식이 담긴 생활미술인 셈이지요. 이 시는 바닷가 어촌마을을 이발소그림처럼 하나 하나 시 속에 그려 넣습니다.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내 풍경과 섞이고, 그 풍경의 실체는 비틀린 비유로 어우러집니다. <주검처럼 평화로웠다>라는 무료함이, 마치 시가 액자에 들어앉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51 11월 - 이성복 2001.11.15 1448 212
1050 거미 - 박성우 2001.11.26 1314 209
1049 따뜻한 슬픔 - 홍성란 2001.11.27 1641 190
1048 시간들의 종말 - 김윤배 2001.11.28 1146 202
1047 파문 - 권혁웅 2001.11.29 1251 196
1046 정신병원으로부터 온 편지 - 유종인 2001.11.30 1224 201
1045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 최금진 2001.12.03 1795 207
1044 지하역 - 이기와 2001.12.04 1194 208
1043 빈집 - 박진성 2001.12.05 2285 196
1042 수면의 경계 - 성향숙 2001.12.10 1198 190
1041 조용하고 시끄러운 화단 - 김애란 2001.12.11 1258 186
1040 적멸 - 김명인 2001.12.12 1222 192
1039 너무 아름다운 병 - 함성호 2001.12.19 1634 217
1038 고수부지 - 유현숙 2001.12.20 1487 205
1037 방문객 - 마종기 2001.12.28 1202 199
1036 마른 아구 - 김 경 2002.01.02 1149 213
1035 가문비냉장고 - 김중일 2002.01.08 1142 203
1034 이사 - 원동우 2002.01.10 1197 205
1033 토끼가 달에 간 날 - 윤이나 2002.01.11 1400 211
1032 요약 - 이갑수 2002.01.12 1231 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