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의 쓸모》 / 김나영/ 《천년의시작》 시인선
어느 가난한 섹스에 대한 기억
온 동네가 가난을 식구처럼 껴안고 살던 시절
언니와 나는 일수(日收) 심부름을 다녔다.
우리 집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일수(日收),
월곡동을 지나 장위동을 거쳐 숭인동까지
카시오페아좌처럼 뚝뚝 떨어져 있는 다섯 집을 다 돌면
일수 수첩 사이에서 돈의 두께가 부풀어오르고
내 가슴에 도장밥 빛깔의 별들이 철없이 떠올랐다.
일수 수첩 속에는 각각 다른 여러 겹의 삶들이
붉은 도장의 얼굴을 하고 칙칙하게 접혀 있었다.
어느 날 추위를 툭툭 차며 집에 도착했을 때
‘벌써 갔다 왔니?’ 하던 엄마의 이마에 송송
맺혀 있던 땀방울과 아버지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파도처럼 널브러진 이불, 들킨 건 나였다.
아무것도 못 본 척 문을 닫고 나오던 내 뒤통수를
쌔리며 사춘기는 내게로 다급하게 휘어들었다.
삼십 대 후반의 젊은 부모에게
꼭 묶어두어도 터져나오던,
때론 밥 생각보다 더 절박했을,
한 끼의 섹스가 가난한 이불 위에
일수 도장으로 찍혀 있던, 겨울 그 단칸방.
언니와 나는 일수(日收) 심부름을 다녔다.
[감상]
유년시절 <일수 심부름>의 기억을 담백한 필치로 그려낸 시입니다. 어쩌면 고백하기 힘든 사생활이었을지도 모를 경험을 솔직하게 내보였다는 점에서 더 돋보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비유의 시들과는 사뭇 다른 진정성이랄까요. <이불 위에/ 일수 도장으로 찍혀 있던>으로 확장되는 삶의 부대낌 같은 것이 내내 잔상으로 남습니다. 설령 다섯 군데나 일수놀이를 할 정도의 재력이 정말 가난함과 어울릴까 싶다가도 <단칸방>의 사연이 더 있겠구나 싶어집니다. 시의 본질은 인생에서의 체험의 지속과 누적에서 체득되게 마련입니다. 그 옛날 들켜버린 순간을 이해하기까지 시는 이렇게 기다려왔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