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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적 - 최문자

2008.02.01 18:02

윤성택 조회 수:1265 추천:126

「잠적」 / 최문자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 《현대문학》 2008년 2월호  


        잠적

        맨 처음 나는
        흙으로 된 자였네
        호박씨 하나 심어주면
        좋아라고 언덕을 감고 앉아
        맘껏 씨방을 부풀리던 순한 호박을 키우는
        놀라지 않는 흙이었네
        그런데,
        진정 내가 끝까지 흙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그대, 혹시 흙 속에 암매장된 나의 비누를 보았는가?
        어디서부터 거품이 되어줄 꺼냐고 물었을 때
        소량의 물에다 그리도 쉽게 몸을 문지르던 나는
        비린내 나는 비누였네
        평범했던 흙을 비누로 만든 당신은 누구인가
        그대들의 모든 배터리는 안전한가
        맨 처음 나는
        나무뿌리들하고 통화했었네
        통화버튼을 누르면 쭉 올라오던 수액
        통화가 끝나도 푹 꺼지지 않던 이슬 같은 희망
        그런데,
        하루에도 몇 번씩 배터리가 나간다네 요즘,
        잡으면 툭 꺼지는 비누로 된 거품통화
        이른 새벽부터 거품 일으키려
        물을 뚝뚝 흘려주는 사람 그대,
        혹시 비누 속에 암매장된 나의 흙들을 보았는가
        거품 아래 거기
        비누를 뒤엎고 고개 쳐든 작은 씨앗의 뼈들을 보았는가?
        보푸라기처럼 보풀보풀 묻어 있는 순한 흙알갱이
        모든 배터리를 빼버리고 그를 보러 가게 하는
        당신은 또 누구인가?
        그대들의 배터리는 안전한가?
        오늘 나는 없겠네        
        

[감상]
사람은 결국 누구나 흙으로 돌아갑니다. 삶의 부분들을 충족하고 육신은 자연으로 순환된다고 할까요. 이렇듯 우리 몸에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어느 과학자가 말했듯이 몸을 구성하는 지방분으로 비누 7개를 만들 수 있고, 인은 성냥개비의 머리 2천2백 개를 만들 수 있고, 마그네슘으로 설사약 한 봉지 등을 만든다고 합니다. 이 시는 이렇게 흙으로 돌아가야 할 몸이 물질문명의 도구로서 수단화되고 있음을 암시해줍니다. <평범했던 흙을 비누로 만든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그러하고, 기계의 상징인 <그대들의 배터리는 안전한가?>가 그러합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비누에 거품을 내듯 삶이 조금씩 소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슬 같은 희망>에게 있어 참 쓸쓸한 <잠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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