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편의점·2 - 조동범

2004.03.18 11:17

윤성택 조회 수:1390 추천:239

「편의점·2」/ 조동범 / 《시와사상》 2004년 봄호


  편의점·2
        ― 어느 심야의 인질극


  그는 차분하게 칼날을 겨누고 있다.
  쇼윈도 너머를 살피는 그의 눈은 피곤을 담고 있다. 무성영화처럼
고요한 밤, 냉장고 안의 식료품은 느리게 부패하고 있는 중이다. 그
의 칼날은 차분하게 인질의 목을 겨누고 있다.  쇼윈도 너머에서 총
구가 고요하게 빛난다.  자신을 겨누고 있는 총구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갑자기 허기를 느낀다.  그는 손을 뻗어  냉장고의 샌드위치를
집어 든다.  차갑게 빛나는 식욕,  허기를 채우는 손이 우수수, 떨린
다. 쇼윈도 너머에서 쏟아지는 불빛이 잘게 부서진다.  그는 불빛을
헤집으며 누군가를 찾고 있다. 어머니도 없는 인질극.  그는 눈물을
흘린다. 떨리는 그의 손끝이 인질의 목덜미에 상처를 만든다.  인질
은 공포에 떨며 흐느낀다.  그들은 허둥대며 흔들리고, 쇼윈도 너머
를 더듬는 그의 눈은 총구를 붙잡는다.  그는 어둠을 관통하는 총알
을 발견한다. 총구를 떠난 총알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날아오고 있
는 중이다.  어둠을 뚫고,  느리게 날아온 총알은 이내 그의 몸에 동
굴처럼 길고 캄캄한 흔적을 남긴다.
  샌드위치가 툭, 그의 발치로 떨어진다.



[감상]
단편영화를 보듯 이 시는 시각을 아우르는 감각적인 묘사가 인상적입니다. 놀라운 것은 '총구를 떠난 총알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날아오고 있는 중이다'라는 시간을 늘이는 힘에 있는데, 시공간을 이처럼 자유자재로 재해석해내는 상상력은 이 시를 탁월한 경지에 올려놓습니다. 영화 매트릭스가 홍콩 느와르 총알에서 진일보했듯, 고만고만한 시인들 사이에서 조동범 시인이 독특하고 참신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 싶습니다. 편의점과 배스킨 라빈스, 이런 도시적 공간에서의 삶을 모색하는 감각적인 신세대 시인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51 달1 - 박경희 2002.08.08 1503 241
1050 내 마음의 풍차 - 진수미 2001.08.16 1717 241
1049 12월 - 강성은 [3] 2005.10.26 2073 240
1048 푸른 국도 - 김왕노 2005.08.04 1421 240
1047 음암에서 서쪽 - 박주택 2002.09.24 1086 240
1046 소주 - 최영철 2001.08.06 1556 240
1045 행성관측 - 천서봉 2006.09.22 1521 239
1044 엽낭게 - 장인수 2006.09.13 1272 239
1043 밤바다 - 권주열 [1] 2005.06.22 1532 239
» 편의점·2 - 조동범 [2] 2004.03.18 1390 239
1041 정지한 낮 - 박상수 2006.04.05 1763 238
1040 전생 빚을 받다 - 정진경 2005.12.20 1671 238
1039 움직이는 별 - 박후기 [1] 2003.12.04 1597 238
1038 모니터 - 김태형 2006.06.26 1558 237
1037 나귀처럼 - 김충규 2006.07.13 1749 236
1036 어느 가난한 섹스에 대한 기억 - 김나영 2006.07.04 2417 236
1035 이발소 그림 - 최치언 2006.01.18 1632 236
1034 홈페이지 - 김희정 [2] 2005.10.07 1698 236
1033 주름들 - 박주택 [1] 2005.06.21 1379 236
1032 생크림케이크 - 조은영 2004.03.30 1519 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