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 ― AlphaScan CRT 15"> /김태형 / 『현대시』 2006년 3월호
모니터 ― AlphaScan CRT 15"
한동안 바닷바람으로 집을 지어 그곳에 홀로 머물렀다
발가락이 세 개 달린 빛을 엮어 만든 방화벽
그래도 한쪽 눈동자에 태양의 흑점을 숨긴
저주받은 새가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걷어올린 그물마다 납덩이를 채운 생선들로 가득했다
녹슨 나사로 주린 배를 조이고 있었다
경계 없는 수역을 넘나들며 고작 몇 바이트의 장물을 실어나르고
밤마다 불붙은 기름걸레를 물고 다녔다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만 원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암호화된 나를 더 이상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며칠째 풀어놓은 전자 당나귀들이
은밀히 공개된 하라르 서버에서 디코더를 찾았지만
모래 바다를 채 건너지 못했다
허공 속에 빠지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을
아직 나는 보지 못했다
할 수 없이 훔친 구두를 신고 다녀야 했다
나는 그저 몇 광년을 건너온 빛으로 창문을 몇 개 열었을 뿐
이를테면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창문 밖에는 또 다른 빈 화면이 떠 있고
파란 타일이 깔린 발코니 해안에 한 덩어리 버려진 바다는
먼지 묻은 검은 탯줄로 목을 칭칭 감은 채 뒤돌아 앉아 있다
[감상]
<알파스캔>은 모니터 제조회사 이름 중 하나입니다. 이 시는 컴퓨터의 고장과 관련된 기술적 흐름을 일상의 삶과 연결시킴으로서 낯설면서 회화적인 이미지를 선보입니다. 바이러스로 컴퓨터와 모니터에 이상이 생기자 <당나귀> 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실지로 <당나귀>는 유명한 인터넷 공유프로그램이지요. 아마도 그곳에서 시스템 문제를 해결할 프로그램을 다운 받아 처리코자 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부분의 이미지가 인상적인데, 모니터로 연결되는 전선과 전기코드 등이 <먼지 묻은 검은 탯줄로 목을 칭칭 감은 채>로 강렬하게 표현되었군요.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입니다. 그곳에서 모래로 만들어진 홈페이지는 허망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그저 시간이 불어가는대로 무늬졌다 바람처럼 흩어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