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저녁 빛에 마음 베인다 - 이기철

2007.07.06 18:22

윤성택 조회 수:1545 추천:148

『2007 올해의 좋은시』中 / 이기철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 《현대문학》  


        저녁 빛에 마음 베인다

        저 하루살이 떼들의 반란으로 하루는 저문다
        나는 자줏빛으로 물든 이런 저녁을 걸어본 적 있다
        강물이 잃어버린 만큼의 추억의 책장 속으로
        내가 그 저녁을 데리고 지날 때마다
        낮은 음색의 고동을 불며 청춘의 몇 악장이 넘겨졌다
        누가 맨 처음 고독의 이름을 불렀을까
        적막 한 겹으로도 달빛은 화사하고
        건강한 소와 말들을 놓쳐버린 언덕으로
        불만의 구름 떼들이 급히 몰려갔다
        위기만큼 우리를 설레 하는 것은 없다
        깨어진 약속의 길들이 향수병을 터뜨리고        
        넘어진 빈 술병에는 싸구려 달빛이 담겼다
        저 집들에는 몇 개의 일락과 몇 개의 고뇌와
        거실에서는 덧없는 연속극들이 주부들의 시간을 빼앗고
        이제 어디에도 고민하며 살았던 시인의 생애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시간은 언제나 뭉텅뭉텅 가슴속의 추억을 베어낸다
        그것마저 이제는 아무도 슬픔이라 말하지 않는다
        어린 새가 공포로 잠드는 도시의 나뭇가지 위로
        놀은 어제의 옷을 입고 몰려오고        
        나는 자줏빛으로 물든 이런 저녁을 걸어본 적 있다
        어둠 속에서도 끝없이 고개 드는 사금파리들
        그 빛 한 움큼만으로도 언덕의 길들은 빛나고
        그런 헐값의 밤 속에서 호주머니 속 수첩에 기록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결코 길들일 수 없었던 통증의 저녁도 순한 아이처럼 길든다
        아픈 시대처럼, 말을 담고도 침묵하는 책장처럼


[감상]
뜨겁고 강렬한 한낮에 비한다면 저녁은 왠지 쓸쓸하고 고즈넉합니다. 이 시를 읽다보면 조금은 가라앉은 듯 하면서도 분위기의 격조에 정감이 느껴집니다. <위기만큼 우리를 설레 하는 것은 없다>는 것. 위기란 도전이고 넘어야할 과정이기에, 젊음과 청춘이 떠올려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의 생애란 무엇일까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고독한 자신과의 사투,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가 시인을 만드는 건 아닐까. 아슴아슴 시의 분위기에 스며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31 정지한 낮 - 박상수 2006.04.05 1763 238
1030 가을이 주머니에서 - 박유라 [1] 2005.11.25 1763 218
1029 빗소리 듣는 동안 - 안도현 2001.08.13 1762 235
1028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1] 2001.04.28 1758 321
1027 소나기 - 전남진 2002.05.16 1757 188
1026 아카시아 - 박순희 2001.06.14 1757 313
1025 트렁크 - 김언희 2001.04.11 1757 332
1024 피할 수 없는 길 - 심보선 [1] 2011.02.14 1756 134
1023 혀 - 장옥관 2010.02.12 1756 147
1022 빨간 모자를 쓴 사내 - 문신 [1] 2005.10.28 1756 207
1021 문 열어주는 사람 - 유홍준 [1] 2005.04.25 1756 186
1020 육교 - 최을원 [4] 2004.02.28 1756 193
1019 삼십 대의 병력 - 이기선 [2] 2004.09.01 1753 182
1018 내가 내 안의 나인가 - 김정숙 [10] 2004.04.02 1750 200
1017 나귀처럼 - 김충규 2006.07.13 1749 236
1016 겨울나무 - 이기선 [1] 2008.09.11 1739 100
1015 기도와 마음 - 이지엽 2008.03.24 1738 157
1014 장미 - 박설희 2009.03.09 1737 98
1013 이 밤이 새도록 박쥐 - 이윤설 2006.12.20 1736 233
1012 희망에 부딪혀 죽다 - 길상호 2004.06.04 1735 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