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수화 - 이동호

2007.07.19 17:09

윤성택 조회 수:1266 추천:132

『조용한 가족』 / 이동호 (2004년 『대구매일』 신춘문예로 등단) / 《문학의전당》 (신간) 


        수화(手話)

        그는 나무다 상록수다 그의 입은 가지이고
        그의 언어는 푸른 잎이다
        그가 나이테에 가둔 말을 풀어낸다
        그는 가지 가득 말을 올려놓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눈으로 듣지 못한다
        사람들은 잎사귀를 이해하려 애써보지만
        푸른빛이 시끄러울 뿐이다
        대문 앞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가 잎을 오물거린다
        잎이 점점 심록색(深綠色)이라는 것은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극에 달한 증거
        그가 자신의 가지를 흔든다
        사람들은 멀찌감치 멀어져서 곁눈질이다
        사람들도 나무다 단풍나무다
        방언이 깊어 사람들은 늘 가을이다
        불필요한 상징을 없애고 나면
        늘 그와의 앙상한 거리를 드러낸다
        그와 사람들이 일정한 거리에 서 있는 것이
        서로에 대한 부정은 아니다 삶이다
        그러나 그는 아픈 나무다
        자신의 말에 늘 찔리는 상록 침엽수다
        오늘도 대문 밖에서 그가 푸른 잎을 떨군다
        사람들은 멀찍이 떨어져서도
        귀를 막는다


[감상]
독자로 하여금 들리지 않는 수화(手話)로 하여금 목소리를 듣게 하는 시입니다.  이 시가 군더더기 없이 긴장을 주는 이유는 명료한 직관인 <사람들도 나무다 단풍나무다>라는 상상의 힘으로 새로운 세계를 형상화했기 때문입니다. 나무와 나무의 간격에서 사람살이의 관계를 파악하려는 것이나, 또한 그 거리가 <삶이다>라는 발견도 돋보입니다. 마치 비행기의 굉음처럼 <사람들은 멀찍이 떨어져서도/ 귀를 막는다>는 나무의 푸르름, 시각이 청각으로 넘나드는 상상이 후련하게 읽힙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31 정지한 낮 - 박상수 2006.04.05 1763 238
1030 가을이 주머니에서 - 박유라 [1] 2005.11.25 1763 218
1029 빗소리 듣는 동안 - 안도현 2001.08.13 1762 235
1028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1] 2001.04.28 1758 321
1027 소나기 - 전남진 2002.05.16 1757 188
1026 아카시아 - 박순희 2001.06.14 1757 313
1025 트렁크 - 김언희 2001.04.11 1757 332
1024 피할 수 없는 길 - 심보선 [1] 2011.02.14 1756 134
1023 혀 - 장옥관 2010.02.12 1756 147
1022 빨간 모자를 쓴 사내 - 문신 [1] 2005.10.28 1756 207
1021 문 열어주는 사람 - 유홍준 [1] 2005.04.25 1756 186
1020 육교 - 최을원 [4] 2004.02.28 1756 193
1019 삼십 대의 병력 - 이기선 [2] 2004.09.01 1753 182
1018 내가 내 안의 나인가 - 김정숙 [10] 2004.04.02 1750 200
1017 나귀처럼 - 김충규 2006.07.13 1749 236
1016 겨울나무 - 이기선 [1] 2008.09.11 1739 100
1015 기도와 마음 - 이지엽 2008.03.24 1738 157
1014 장미 - 박설희 2009.03.09 1737 98
1013 이 밤이 새도록 박쥐 - 이윤설 2006.12.20 1736 233
1012 희망에 부딪혀 죽다 - 길상호 2004.06.04 1735 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