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퀼트』 / 김경인 (2001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 《랜덤하우스》
검은 편지지
누군가 내 속 깊이 숨어들어
차곡차곡 접어둔 편지를 뜯고 있어
잠 밖에서 서성이던 내가
편지를 감추려 뛰어들면
어디선가 우르르 천둥이 치고
집으로 가는 계단이 무너지고
끊어진 층계를 따라
저 혼자
절뚝이며 달리는 어린 그림자
나를 붙들고 있어
머릿속, 줄줄이 늘어선 검은 잉크병들이
왈칵 쓰러져 그림자를 덮치면
까맣게 탄 거리 위로 앰뷸런스가 달려오고
타다 만 집이 솟아오르고
집 안엔 또 내가 하나 둘 셋
담배꽁초 나뒹구는 마루에 앉아
불에 덴 손가락으로 또 편지를 쓰고 있어
방 안에선 엄마가
편지 따윈 그만 쓰라고 타이르고 있어
(엄마, 오늘만 좀 참아줘요
누군가 편지를 또 뜯었나 봐요)
까만 글자들이 몸 안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어
날마다 낡은 글씨만 늘어놓은 채
쿵쿵 뛰기만 하는
지겨운 내 종이가 닳아가고 있어
자꾸만 목울대를 움켜쥐는
이 무거운
글자들을 다 쏟아내야 할 텐데
어긋난 길만 만드는 지문도
찍어 보내야 할 텐데
[감상]
편지란 타인의 입장에서는 참 비밀스러운 것이지요. 그래서 편지 그 자체에는 은밀하고 숭고한 진정성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이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예전의 자아에 새로운 자아를 덧씌우는 연속적인 과정일 것입니다. 이 시의 첫 행의 <누군가>란 이처럼 끊임없이 지금의 존재를 깨우치려 과거를 들추는 침입자인 셈이고, <잠 밖에서 서성이던> ‘나’는 과거를 지키고 보존하려는 무의식의 자신입니다. <어린 그림자>는 그래서 구원을 열망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끊어진 층계>라든지 <타다 만 집이 솟아오르>는 풍경을 통해서 내면의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상상력에 힘이 있습니다. 누렇게 바래고 잉크가 번진 生의 편지지에서부터 존재를 끊임없이 타전하려는 의지도 인상적이고요. 제법 두툼한 시집, 읽기 좋은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