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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 1 - 유종인

2007.07.25 17:59

윤성택 조회 수:1267 추천:128

『수수밭 전별기』 / 유종인 (1996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 《실천문학》 (신간)


        모과 1

        불뚱이처럼 서서 그가 주워섬기는 말을
        침묵은 허공에게 건넨다

        왕년에 한주먹 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주먹보다 술에 더 길들어 있다
        
        왕년의 주먹은 이제
        술병을 아니 술잔을 드는데도 쉽게 떨린다
        
        왕년이 다시 온다면
        그 당찼던 돌주먹을 잠시만 가을볕에 매달아놓고,
        보기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
        창가에 골똘히 굄질해놓아라

        상심한 당신 속내를 아무도 씹지 않으니
        왕년은 갔다고 슬픈 주먹다짐은 마라

        제자리서 천 년을 바위 묵어도
        향기는 물러터지는 자의 순애보인 것,
        그 색이 보이지 않아도 왕년은 살아 있는 것

        주먹을 쥐고도
        주먹을 펴 주위를 보듬는 향기여


[감상]
'왕년'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대체로 추억의 힘이 셉니다. 그런 사람 곁에서 이야길 듣고 있노라면 그 사람의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지요. 이 시는 그런 단단한 '주먹'이 '모과'로 형상화 되는 과정이 애틋하게 이어집니다. '왕년은 갔다고 슬픈 주먹다짐은 마라'에서 알 수 있듯 시를 전개하는 화자는 이제 막 노랗게 익어가는 모과에게 마치 타이르는 것 같습니다. 울퉁불퉁하고 향기는 나지만 맛은 시고 떫은 모과에게서 '순애보'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시의 매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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