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늪이 잠시 흔들렸던 기억 - 이수익

2007.08.03 13:34

윤성택 조회 수:1200 추천:124

『꽃나무 아래의 키스』 / 이수익 (1963년 『서울신문』으로 등단) / 《시작》  


        늪이 잠시 흔들렸던 기억

        뻘 속에 갇힌 그의 두 눈꺼풀이 가엾게도 꿈벅,
        꿈벅, 기포처럼 여닫힌다.
        지금 그의 몸은 욕망의 탕기처럼 들끓는 진흙 수렁에
        깊숙이 매몰되어 점점 굳어가고 있다.

        그를 가득히 삼킨 뻘의 짙고 푸른 육체는
        더욱 기름지게 살아 꿈틀대고
        오랜 날들을 뻘을 가두고 키워온 늪은
        환희의 이스트를 크게 부풀려 올린다.

        이제 그의 죽음은 안타깝게 분초를 다툴 일이지만
        늪가를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숲도, 숲을 세차게 뒤흔드는 새들도,
        바람도, 그리도 태양도
        그를 압박하듯 조여드는 뻘의 완강한 집착을 모르는 척
        애써 외면할 뿐이다. 어쩌면 그들은 공범일지도 모른다.

        지금 한 사람은, 그 언젠가 또 다른 한 사람이 그랬듯이
        뻘 속에, 뻘의 빛나는 자양분으로, 그의 피와 살과 뼈를
        모두 질펀하게 풀어놓을 것이다.
        힘겹게도 그의 눈꺼풀이 한번 여닫힐 적마다
        전체 늪의 표정이 한껏 밝아지고 있는,

        어느 목숨의 눈부신 파멸.


[감상]
얼굴이 하늘을 향한 채 늪에 빨려 죽어가는 한 사내가 정밀하게 묘사됩니다. 왜 사내가 그곳에 있는지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마치 끈끈이주걱처럼 곤충을 포획하듯 오므라드는 늪의 움직임과 뻘 속 꿈벅이는 눈꺼풀이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너무 짙은 숲이 때론 공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숲>과 <새들>과 <바람>, 그리고 <태양>이 동물성으로 아우성거리는 풍경, 인적도 없고 다만 고립만이 숲의 전부인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피와 살과 뼈를/ 모두 질펀하게 풀어놓을>을 가만히 떠올려보자니 <늪>이야말로 초록색 토사물을 흘리고 있는 좀비 같다는 생각! 시집 뒷면의 글처럼 <시적 대상의 움직임과 고요함을 동시에 빨아들이는 섬세한 숨결이 밴>시집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31 기차는 간다 - 허수경 [2] 2001.08.01 1568 236
1030 그 거리 - 이승원 2006.01.12 1938 235
1029 거품인간 - 김언 2005.05.18 1626 235
1028 가을에는 - 최영미 [3] 2001.08.31 2431 235
1027 빗소리 듣는 동안 - 안도현 2001.08.13 1762 235
1026 그러한 광장 - 정익진 2006.03.13 1523 234
1025 이 밤이 새도록 박쥐 - 이윤설 2006.12.20 1736 233
1024 뒤란의 봄 - 박후기 [1] 2006.04.01 1820 233
1023 총잡이들의 세계사 - 안현미 [1] 2006.02.23 1612 233
1022 환청, 허클베리 핀 - 김 언 2002.08.30 1177 233
1021 소쩍새에게 새벽을 묻는다 - 심재휘 2002.08.07 1162 233
1020 해바라기 - 박성우 [2] 2006.12.02 2122 232
1019 떫은 생 - 윤석정 [2] 2006.02.17 1967 232
1018 콘트라베이스 - 이윤훈 2005.12.30 1614 232
1017 추억 - 신기섭 [6] 2005.12.06 3154 232
1016 꽃무릇에 찍히다 - 신수현 2004.03.22 1294 232
1015 흔적 없는 흔적 - 이민하 [1] 2003.09.23 1470 232
1014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 박찬일 2002.10.10 1112 232
1013 어느 날 문득 - 김규린 2001.08.14 1779 232
1012 하모니카 부는 참새 - 함기석 [2] 2006.09.06 1716 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