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루드베키아 - 천외자

2007.09.07 19:04

윤성택 조회 수:1162 추천:100





「루드베키아」 / 천외자 (2002년 『시현실』로 등단) / 《열린시학》 2007년 가을호


        루드베키아

        그는 나오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서 쉼보르스카 시집을 꺼낸다
        책을 펴서 얼굴을 가리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삼십분만 소리죽여 울다가 일어설 것이다
        루드베키아가 피어있는 간이역
        서로 떨어진 꽃잎이 제각각 바라보는 방향으로
        이별은 역사의 빈 공터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시들고 있다
        누군가 새롭게 만들고 있다
        만남을 잃어버린 역사에서 모든 것은 이별의 진행 방향이다
        기차가 떠난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의자에서 일어선다
        출구로 나가는 사람들 속에 내가 없어도 아무도 주의 하지 않는다
        의자 위에는 바람이 시든 장미 다발처럼 놓이고
        나는 선로 건너편 루드베키아 꽃밭 속으로……
        시베리아로, 안데스로, 히말라야로, 실크로드로……
        샛노란 꽃잎의 길이 열린다
        이 많은 길을 누가 만들었을까
        카테리니행 기차는 여덟시에 떠났다네
        또 다른 루드베키아 한 송이가 새로 핀다
        하나가 아니고 유일한 것도 아니고
        이별은 일상이 되고
        이제 얼굴을 책으로 가리고 혼자 울지 않아도 된다


[감상]
가을은 왠지 센티멘털하여, 마음을 사치해도 용서가 될 것 같은 계절입니다. 이 시를 읽으니 가을의 정취에 흠뻑 젖는다고 할까요.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지 않아도 ‘한때 우리는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싶어집니다. 어느 간이역 벤치에서 <시베리아로, 안데스로, 히말라야로, 실크로드로……> 떠올리는 시적 확장이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군요. <이별>을 시의 정조로 환치시키는 <이별은 역사의 빈 공터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시들고 있다> 부분이나 그 역설이 의미하는 깊이도 마음을 붙잡습니다. 카테리나행 여덟시 기차는 이미 소설이나 가요로도 정서화(?)가 되었지요. 이 시가 그런 코드를 반복하는 이유, 나름 감성의 극대화를 위한 방편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31 정지한 낮 - 박상수 2006.04.05 1763 238
1030 가을이 주머니에서 - 박유라 [1] 2005.11.25 1763 218
1029 빗소리 듣는 동안 - 안도현 2001.08.13 1762 235
1028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1] 2001.04.28 1758 321
1027 소나기 - 전남진 2002.05.16 1757 188
1026 트렁크 - 김언희 2001.04.11 1757 332
1025 피할 수 없는 길 - 심보선 [1] 2011.02.14 1756 134
1024 혀 - 장옥관 2010.02.12 1756 147
1023 빨간 모자를 쓴 사내 - 문신 [1] 2005.10.28 1756 207
1022 문 열어주는 사람 - 유홍준 [1] 2005.04.25 1756 186
1021 육교 - 최을원 [4] 2004.02.28 1756 193
1020 아카시아 - 박순희 2001.06.14 1756 313
1019 삼십 대의 병력 - 이기선 [2] 2004.09.01 1753 182
1018 내가 내 안의 나인가 - 김정숙 [10] 2004.04.02 1750 200
1017 나귀처럼 - 김충규 2006.07.13 1749 236
1016 겨울나무 - 이기선 [1] 2008.09.11 1739 100
1015 기도와 마음 - 이지엽 2008.03.24 1738 157
1014 장미 - 박설희 2009.03.09 1737 98
1013 이 밤이 새도록 박쥐 - 이윤설 2006.12.20 1736 233
1012 희망에 부딪혀 죽다 - 길상호 2004.06.04 1735 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