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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눈을 감았다 뜬다 - 황동규

2007.09.14 17:56

윤성택 조회 수:1406 추천:102

「누군가 눈을 감았다 뜬다」 / 황동규 (19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 《문학의문학》 2007년 가을호


        누군가 눈을 감았다 뜬다

        산책길 나무 하나 트럭 타고 이사 가고
        대신 조그만 나무 하나 심겨졌다.
        몸속에 입력된 개화(開花) 프로그램 지워버린
        진달래 철쭉 영산홍이 서로 눈치 보지 않고
        한꺼번에 피다 시들자
        장미들이 봉오리를 열기 시작했다.
        자주 보던 사람 하나 어느 샌가 사라지고
        그가 늘 앉곤 하던 벤치에
        오늘 다른 사람이 앉아 있다.
        빈자리는 늘 누군가 와서 다시 채운다.

        벤치에 혼자 앉아 고개 숙이고
        연못에 핀 연꽃과 7월 저녁의 넉넉한 그림자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 하나,
        주위는 무언가 한없이 비어있다는 느낌,
        언제부터인가 그는 눈을 감고 있다.
        진한 저녁 빛깔의 사람을 만나면 불 만난 나방처럼
        무작정 속이 저리는 눈뜬 사람 하나 발걸음 멈추고,
        발밑에서 까치 하나가 빠른 4분의 5박자 까치발로 뛰어서
        눈 감고 있는 사람 곁으로 간다.
        누군가 눈을 감았다 뜬다.
        모든 것이 잠시 정지해 있는 밝음 속에
        그가 천천히 뒤돌아본다.


[감상]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이 시는 그 시간의 아련한 공간감을 표현합니다. <자주 보던 사람 하나 어느 샌가 사라지고>의 사라짐은 이 생에 대한 이별입니다. 그래서 공원 벤치는 다른 누군가처럼 사라져갈 사람이 거쳐야할 장소일지도 모릅니다. 무언가 생각에 골몰할 때 눈을 감곤 하지요. 눈을 감는 순간 추억은 다시 환해지는 현실로 펼쳐집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그 빈 공간이 한없이 쓸쓸해 보일 때 이 시는 <모든 것이 잠시 정지해 있는 밝음>을 보여줍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일지도 모를 그곳에서 당신이 뒤돌아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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