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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소 - 김선우

2007.10.12 11:18

윤성택 조회 수:1217 추천:115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1996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 《창비》시인선(2007)


        퉁소

        평범하기 그지없던 어느 일요일 낮잠에서 깨어난 내가
        잠자는 동안 우주가 맑아졌어, 라고 중얼거렸다
        알 수 없지만, 할머니가 좋은 곳으로 가신 것 같았다

        그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평범하기 그지없던 일요일
        가난한 연인들이 되풀이하며 걸었을 골목길을 걸었고
        쓰러져가는 담장의 뿌리를 환하게 적시며
        용케도 피어난 파꽃들의 무덤을 보았고
        변두리 야산 중턱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아
        상수리나무 우듬지를 오래도록 쳐다보았을 뿐
        평생토록 한곳에서 저렇게 흔들려도 좋겠구나,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 위에서
        생채기를 만들지 않고도 나무 그늘이 진자처럼 흔들렸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노란 새가 퉁소 소리를 내며 울었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무심한 장난처럼
        가끔씩 구름 조각을 옮겨다 거는 동안
        나는 가만히 조을다 까마득한 낮잠에 들었을 뿐
        너무 길지 않은, 너무 짧지도 않은
        그 시간에 어떤 손들이 내 이마를 쓸고 지나간 걸까

        십이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왜 갑자기 생겨났는지
        목젖 아래 깊은 항아리로부터
        우주, 라는 말이 왜 떠올라 왔는지 알 수 없지만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노랫소리와 구름 조각을 옮기던
        새의 깃털 하나하나가 퉁소 구멍처럼 텅 비어
        맑게 울리는 게 보였다        


[감상]

시를 쓴다는 것은 영혼의 주파수를 열어놓고 채널을 돌리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저 막막한 일상이 아니라 무언가 끊임없이 교신되는 것이 시의 본령입니다. 일요일 낮잠에서 일어나 <우주가 맑아졌어>라고 하는 말에서 비롯된 이 시는, 직관의 의미를 곱씹으며 평범한 일상에서 의미를 찾아냅니다. <나무 그늘>이 진자처럼 흔들리는 것도, <이마>를 쓸고간 무언가를 느끼는 것도, 12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리는 것도 우주의 질서 안에서의 느낌들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늘 깨어 있어야겠지요. 그래야 극대화된 오감으로 새의 깃털 속 <퉁소>를 듣는,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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