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 박설희 (2006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 《실천문학》의 시집 177
장미
빨간 신호등 하나 켜 있다
내 발을 묶는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순간 장미꽃 같은 그 안에 갇힌다
붉은 꽃잎이 겹겹이 나를 감싼다
이 거리는 풍성한 장미 한 다발
길들이 줄기처럼 뻗어나간다
둥근 잎새마다 빼곡히 들어찬 상점들
셔터의 문이 올라가면 꽃잎 하나 환히 피어난다
나는 그 곳에 들어가 향수를 산다
물관 체관을 따라 지하로 지상으로 오르내리는
인파에 밀려 나는 풀벌레처럼
봉오리로 봉오리로
장미꽃은 계속 피어난다
내 손이 더듬은 속옷 몇 장, 셔츠와 바지, 자동판매기
내딛는 공간마다
자전거가 튀어나온다, 과일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차가 급정거 한다
어디에 가시가 있었는지
마음 속에서 피가 점점이 배어 나온다
까마득한 어둠 끝에 핀,
빨간 신호등 하나 깜박인다
묶인 발이 풀린다
건너가야 할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다
[감상]
신호등 푸른색이 되기까지의 시간 동안, 이 시는 붉고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로 식물처럼 뻗어갑니다. 발걸음이 마치 장미다발처럼 묶이고, 속도로 뻗어가는 검은 아스팔트길 곳곳에 붉은 신호등이 탐스럽게도 피어납니다. 시 곳곳에 이렇듯 활기가 도는 것은 상상력에 향기가 번지기 때문입니다. 무료한 일상이 반복되는 우리의 삶에서 장밋빛 세상이 이처럼 가까이 있습니다. 쇼윈도 불빛을 빗댄 장미 꽃잎, 물관 체관이 되는 지하도들, 가시가 암시되는 교통사고 그리고 핏빛 장미의 색감…… 그러다 ‘까마득한 어둠 끝’ 신호등이 푸른색으로 바뀌면 마법이 풀리듯 장미꽃이었던 발들이 풀리고, 다시 일상으로 우리는 쓸쓸히 흩어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