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식물성이다』 / 김규린 / 문학과지성사
어느 날 문득
산다는 건 불치 같애
무거운 가지들이 자꾸
검은 기둥처럼 캄캄히 가로막으니
차라리 암세포나 되어 그 기둥에 납작
눈부신 뿌리 내릴까
노랑꽃 위에서
한차례 오수를 즐기고
비 맞아 승천하는 구름기둥에 편승해볼까
닿아야 할 마을은 보이지 않고
불치의 뼈다귀들이
길에 엎드려 편지 쓴다
제 몫으로 남겨질 미완의 편지
연필심에 이슬 묻혀가며, 그래
산다는 건
불치고말고
마을로 이어지는 구름기둥에
한 점 묻은 먼지고말고
[감상]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해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날 문득 먼지로 사라질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영혼이 존재한다면 분명 마음의 기록으로 남겨질 삶을 의미합니다. 먼지처럼 살다가지만 이슬에 연필심을 적셔가며 세월을 기입하는 일, 불치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