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릇에 찍히다」/ 신수현 / 《시와사상》 2004년 봄호
꽃무릇에 찍히다
여름 끝 무렵 호남선 타고 광주에 갔었네 흰벽당 앞뜰에서 리콜리
스 혹은 상사화라 불린다는 꽃무릇, 난생 처음 보았네 받쳐주는 이
파리 눈 씻고 보아도 없이 꽃잎만 타오르고 있었네 그 꽃무릇 군락
에서 카메라에 몇 장 찍혔을 뿐인데 한사람과 한 지붕 밑에서 뒹굴
고 부대낄 수 없던 내 전생이 고스란히 인화지에 배어나와 서울로
돌아왔네 서로 다른 방에서 밥숟가락 들다가 이쁜 옷 입다가 잠자
리에 뒤척이다가 문득,
잡을 곳 없는 줄기 위에
결코 외로워 보이고 싶지 않은
둥근 알뿌리마다 사랑을
벗어두고 온 내가
갉아대고 떼어먹고 천방지축 발굴러도 끄덕없는 품안에서 자꾸 투
정부리지 말라고 다음 생에서도 돌아오지 말라고 간절한 눈빛으로
내가 꽃,
잎을 기다리고 있네
[감상]
잎은 꽃을 생각하고 꽃은 잎을 생각한다하여 상사화라 하지요. 이 시는 상사화를 통해 자신의 전생과 이 생의 삶을 내다봅니다. '서로 다른 방에서 밥숟가락 들다가 이쁜 옷 입다가 잠자리에 뒤척이다가 문득'의 부분이 말해주듯 우린 이제 남남이 되어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꽃이 되었고 나는 이제 잎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습니다. 꽃 사진 몇 장으로 상상력이 이처럼 향기롭다니, 새삼 봄꽃들이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