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밤이 새도록 박쥐>/ 이윤설/ 《시에》 2006년 가을호
이 밤이 새도록 박쥐
나야 네 곁을 오리처럼 뙤뚱뙤뚱 따라다니던 그래 나야
불빛 한 점 날아와 부딪치는 다방 창가
너는 턱 괴어 애인을 기다리지만
베토벤 교향곡 음표들처럼 거꾸로 천장에 매달려
네 크림빛 눈물이 나태하게 풀리는 동안
퐁당 퐁퐁당 네 이마 위로 각설탕을 빠뜨리는, 그래 바로 나야
네가 정중히 뒷문을 가리키며 꺼지라고 소리치던 나야 나
네가 쓰레기라고 말했던 나야 나, 검게 탄 미소로 뒷걸음치다
난 자동차에 치였을 뿐,
신발이 구르고 어깨를 감싸던 검정 망토가 풀썩 덮쳤지
삐뽀삐뽀 사거리 순서가 뒤얽혀
신호등이 앵무새의 호동그란 눈을 치켜뜨고
경광등을 켠 고양이들은
거리로 몰려나왔지 딴 세상의 똘마니들이 도래한 거야
힘들어 죽겠는 망토의 두 팔을 쫙 펼치자 때마침 바람이 폭풍이
아하 비틀,
할 줄 알았겠지만 나는 붕 날아올랐어
해와 달이 쌍생아처럼 서로
껴안고 나무들은 머리를 흔들며 비명을 지르고
작고 순하지만 성질이 불 같은 집들이 바람의 살집 아래
화들짝 눈을 떴어
더러운 환풍구야 식당 뒷문이 흘리는 비웃음아
굴욕을 토하는 골목들아 날 봐
납작한 사거리 납작한 마을 납작한 산,
접부채처럼 활짝 펼친
날 좀 봐 주름이 좀 이뻐
날아가는 내 날개 사이로 하늘이 다 비치고
높이 솟다가 문득 내려앉는
나야 나
너는 애인을 기다리다
한 점 불빛 날아와 부딪는 커피잔을 훌쩍 들이마셨을 때
거꾸로 매달린
나를 본 거야 맞아 나야
너는 스푼을 내던지며 박쥐, 라고 소리 쳤어
다방 목조계단을 쿵쾅쿵쾅 뛰어내려와
문을 열었고, 순간 삐거덕거리는 계단의 무릎이 꺾이고
놀란 네 몸이 와르르 무너졌지, 나야 그래 나야
네가 쓰레기라고 말했던 그래
이제는 달을 지우고 사라지는 지붕과 지붕 사이
눈빛이 칼날같이 그려진 나야
얼굴을 파묻고 검정 망토에 손깍지 끼면
발밑이 떠오르고 두 팔 벌리어 바람의 양감을 느낄 수 있고
조타수처럼 방향을 조종할 수도 있지
날아가는 나를 알아보는 이는 없겠지만
내 검은 그림자는 숲에서 죽은 새의 몸처럼 눈에 띄지 않는
숨은 비밀이겠지만 갈대숲의 흔들리는 고뇌 속에
내 눈물이 떨어진 걸 아무도 모를 테지만
여전히 사랑을 원하는 삐진 표정이겠지만
울먹이는 밤엔 창 열어 눈을 마주쳐 보아도 좋아
밤의 책장이 저 혼자 덮히거나 부엌등이 파닥 튀거나
알지 못할 천공의 울림이 가까이 다가오면
나 잘 살고 있어, 네가 쓰레기라고 말했던 그래 나야
지붕과 지붕 사이 붕 떠올라 달을 쿡 찌르고
쿡, 쿡, 쿡, 웃어 죽겠는 나야 나
눈빛이 칼날같이
이제 나야 나
[감상]
이 시가 긴 詩임도 불구하고 단숨에 읽게 하는 흡인력은 간결한 리듬과 빠른 전개 때문이지요. <나야 나>로 이어지는 화자는 <박쥐>의 목소리로 경쾌하지만 서늘하게 읽혀옵니다. <박쥐>의 생태와 비행방법 등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거기에서 행위를 엮어내는 치밀함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시에 이면에 숨어 있는 소름 돋는 진의는 <빙의현상>을 암시하는 데 있습니다. <너는 애인을 기다리지만>에서 알 수 있듯 현재 <애인>은 부재중입니다. 대신 <박쥐>가 그 역할을 대신하듯 화자를 살피고 있는데, 어쩌면 <애인>은 <네가 정중히 뒷문을 가리키며 꺼지라고 소리치던> <네가 쓰레기라고 말했던> 당사자일지 모릅니다. 그 소릴 듣고 애인은 <뒷걸음치다> 자동차에 치이고 신발이 바닥에 나뒹굴었던 것인데, <너>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죽고 육신을 잃은 혼백(영혼)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다가 적당한 매개체를 통해 영체가 깃들기도 합니다. 그런 곳은 대체로 흉가 등에 있게 마련인데 아마도 그곳에 있던 박쥐 한 마리에게 그 정신이 옮겨간 것은 아닌지요. 그리하여 애인이 박쥐로 돌아와 다방 위에서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합니다. <나 잘 살고 있어>. <지붕과 지붕 사이 붕 떠올라 달을 쿡 찌르고/ 쿡, 쿡, 쿡, 웃어 죽겠는 나야 나/ 눈빛이 칼날같이/ 이제 나야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