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바다의 등 - 차주일

2011.01.11 10:38

윤성택 조회 수:806 추천:67


《냄새의 소유권》/  차주일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 《시작시인선》118

          바다의 등

        바다가 돌연 해류를 바꿔 마음에 이을 때가 있다
        굳은 맹세 끝에 조바꿈표 같은 숨 몰아쉬듯
        바다도 조를 바꿔 파도를 모는 밤이 있다. 그런 날은
        네 숨소린 바다를 닮았지, 라고 말하던 해녀가
        바다에 그림자를 지우며 물질한 날이다
        젊은 지아비를 파도의 쉼표로 떠나보내고
        급살맞을 년이란 주홍글씨를 낙인한 채 살아온 그녀
        어둡고 슬픈 A단조로 평생을 살아야한다
        음자리표를 내리긋는 동작으로 무잠이질한다
        그녀가 호흡을 끊고 견디는 시간은 생계를 잇는 일이어서
        자맥질로 펼쳐진 빈 악보에는
        자식들의 숟가락질이 음표처럼 걸린다
        바닷물로 그림자를 다 지운 그녀가 뭍을 밟으면
        내일의 생계는 늘 오늘에 남는다
        찌그러진 부레처럼 잠든 그의 등을 쓰다듬는다
        그녀의 등가죽이 파도 형상으로 출렁거린다
        

[감상]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 소리, 포말이 부서지는 소리… 인류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이 음악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때로는 격랑으로 어느 날은 잔잔한 수위로 다양한 음폭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이 시는 그 음악을 ‘해녀’의 삶과 오버랩 시키면서 비유의 변주로 이어갑니다. 한 문장 한 문장 밀도 있는 수사에서 깊이 있는 통찰이 느껴지는군요. ‘호흡을 끊고 견디는 시간은 생계를 잇는 일’, ‘내일의 생계는 늘 오늘에 남는다’. 특히 해녀의 등을 ‘파도’로 환치시키는 말미는 전체적인 주제를 선명하게 각인시켜줍니다. 이곳에 있어도 그 파도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91 마블링 - 권오영 2020.04.23 356 0
1190 조난 - 윤의섭 2011.01.05 693 75
1189 얼음 이파리 - 손택수 2011.01.01 696 61
1188 가방 - 유미애 2011.01.04 711 80
1187 강변 여인숙 2 - 권혁웅 2011.01.06 727 72
1186 와이셔츠 - 손순미 2011.01.10 751 69
1185 근황 - 정병근 2010.12.31 755 81
1184 그믐 - 김왕노 2011.01.13 782 75
» 바다의 등 - 차주일 2011.01.11 806 67
1182 부레 - 박현솔 2011.01.29 815 108
1181 단봉낙타의 사랑 3 - 박완호 2003.04.17 846 163
1180 자전거 보관소를 지나며 - 문정영 2003.01.03 854 172
1179 추상 - 한석호 2009.11.21 855 119
1178 뚜껑이 덮인 우물 - 이향지 2003.01.06 872 195
1177 공중의 유목 - 권영준 [1] 2003.02.04 888 160
1176 뿔에 대한 우울 - 김수우 2002.12.24 894 161
1175 불우를 씻다 - 유정이 2011.01.27 895 112
1174 암각화 - 오탁번 2003.04.01 902 165
1173 대설 - 정양 2009.11.19 905 109
1172 나무 안에 누가 있다 - 양해기 2009.11.18 906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