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가문동 편지 - 정군칠

2006.02.02 17:31

윤성택 조회 수:1657 추천:229

<가문동 편지> / 정군칠/  1998년 《현대시》 로 등단


        가문동 편지

        낮게 엎드린 집들을 지나 품을 옹송그린 포구에
        닻을 내린 배들이 젖은 몸을 말린다
        누런 바다가 물결져 올 때마다
        헐거워진 몸은 부딪쳐 휘청거리지만
        오래된 편지봉투처럼 뜯겨진 배들은
        어디론가 귀를 열어둔다

        저렇게 우리는,
        너무 멀지 않은 간격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살을 맞대고 사는 동안
        배의 밑창으로 스며든 붉은 녹처럼
        더께진 아픔들이 왜 없었겠나
        빛이 다 빠져나간 바다 위에서
        생이 더욱 빛나는 집어등처럼
        마르며 다시 젖는 슬픔 또한 왜 없었겠나

        우리는 어디가 아프기 때문일까
        꽃이 되었다가 혹은 짐승의 비명으로 와서는
        가슴 언저리를 쓰다듬는 간절함만으로
        우리는 또 철벅철벅 물소리를 낼 수 있을까

        사람으로 다닌 길 위의 흔적들이 흠집이 되는 날
        저 밀려나간 방파제가 바다와 내통하듯
        나는 등대 아래 한 척의 배가 된다
        이제사 너에게 귀를 연다


[감상]
북제주군 애월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가문동 포구가 있습니다. 이 시 포구의 배들은 먼 바다의 기별을 담고 온 편지입니다. 겹겹 배들은 마치 사서함에 쌓인 모양처럼  <너무 멀지 않은 간격>이겠고요. <배의 밑창으로 스며든 붉은 녹>을 들여다보는 직관과 감정의 흐름이 참 편안합니다. 특히 <귀를 연다>라는 표현에서 따뜻해지는 건, 우리네 살아가는 아픔이나 사랑이 포구의 아름다운 사연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11 어도 여자 - 김윤배 2007.06.07 1083 138
1010 자유낙하운동 - 권주열 2003.12.20 1084 205
1009 음암에서 서쪽 - 박주택 2002.09.24 1086 240
1008 움직이는 정물 - 김길나 2003.09.26 1086 183
1007 선명한 유령 - 조영석 2004.11.15 1086 165
1006 브래지어를 풀고 - 김나영 2011.01.12 1086 78
1005 참붕어가 헤엄치는 골목 - 김윤희 2003.01.29 1087 196
1004 공중부양 - 박강우 2004.04.12 1087 225
1003 연두의 시제 - 김경주 [1] 2009.12.02 1087 119
1002 처용암에서 1 - 김재홍 2003.09.24 1088 195
1001 프랑켄슈타인 - 김순선 2004.06.17 1088 174
1000 론강의 별밤, 테오에게 - 박진성 2002.05.07 1089 190
999 시,시,비,비 - 김민정 2010.01.16 1089 116
998 비닐하우스 밤기차 - 이승주 2011.02.21 1089 116
997 골목의 캐비넷 - 정병근 2003.10.27 1090 192
996 그의 바다는 아직 살아 있다 - 박현주 2002.10.29 1092 180
995 모든 꽃은 흔들리며 뿌리로 간다 - 강미정 2003.02.03 1092 169
994 구멍에 들다 - 길상호 2003.06.10 1092 154
993 구관조 - 전정아 2007.05.31 1092 166
992 이장 - 한승태 2002.06.18 1094 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