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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산책 - 최승호

2006.02.28 16:34

윤성택 조회 수:2229 추천:243

<밤의 산책> / 최승호/  《문예중앙》 2006년 봄호


        밤의 산책

        집이 말뚝도 아닌데
        벌써 집을 말뚝 삼아
        나는 골목을 일곱 바퀴나 돌고 있다
        밤의 골목은 텅 비었다
        전봇대마다
        범죄를 비추는 가로등이 있고
        가로등 아래
        환히 비춰봐야 쓰레기뿐인
        쓰레기자루들이 모여 있다
        뚱뚱한 쓰레기의 대가족
        오늘 텔레비전에서 하마 시체를 보았다
        뻥 뚫린 살가죽 속에서
        독수리들이 내장을 꺼내 먹느라
        머리가 피범벅이 되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무시무시한 경쟁의 풍경 속에서도
        죽은 하마는 두엄더미처럼 무심했고
        무슨 큰 바위처럼 엎드려 침묵했다
        그 침묵은 지금
        밤의 골목에 늘어선 텅 빈 차들에도 가득하다
        나는 골목을 아홉 바퀴째 돌고 있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나도 숫자를 배웠다
        거의 이만 번째 밤을 향해
        홀로
        영혼이 어두운 하마처럼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감상]
<골목>과 <하마>라는 두 소재가 한 편의 시에 녹아있습니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시인의 직관에서는 몽돌처럼 자연스럽게 섞이는군요. 이미지를 어렵지 않게 갈마쥐는 방식에서 연륜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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