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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니 맨 - 김학중

2010.02.04 18:22

윤성택 조회 수:1480 추천:130

  <저니 맨>/  김학중 (2009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 《문학사상》2010년 1월호 신인당선작 中

        저니 맨

        그는 유망주였다
        공을 쥘 때마다
        세계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다고 느꼈다
        심장이 담장을 넘어갈 때마다
        모자를 고쳐 썼다
        자신의 삶이 실점에 대한 기록임을 지켜봐야 했지만
        그는 끝까지 배트를 잡지 않았다
        - 누구도 자신을 위해 타석에 설 수 없다고 낮게 얘기했을 뿐 -
        그리고 긴 여행은 시작되었다

        그는 이제 큼직한 여행 가방을 끌고
        플랫폼에 서 있다
        불쑥 내뱉고 싶던 말처럼
        가방의 터진 겉감 사이로 안감이 비집고 나와 있다
        그 안에 그의 여행이 온전히 담겨 있다
        언제부터 입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바지 몇 벌과 셔츠 몇 벌
        유니폼만이 새것인 채로 매번 바뀌었다
        그의 짐은 매일 다시 첫장부터 쓴 낡은 일기장
        몇 장을 뜯어냈는지 알 수 없는 인생

        자신을 짐으로 쌀 수 있다는 것이 위안인 그가
        지금 플랫폼에 서 있다
        열차가 들어오면 그는 곧 떠나야 한다
        한 손은 여전히 공을 쥐고 있는 듯 둥글지만
        그는 곧 가방을 잡기 위해 손을 펴겠지
        공 하나를 세계의 심장이라고 믿던
        그는 익숙한 듯 모자를 고쳐 쓰고는
        열차가 멈추는 소리를 듣는다
        세계를 주무를 수 없는 그의 손은
        이제 온전히 자신을 쥐고
        문이 열리는 열차로 들어설 것이다

        가방의 무게에 그의 팔이 살짝 떨리는 것이 보인다.

  
[감상]
저니 맨(journey man)이란 해마다 또는 자주 팀을 옮기는 운동선수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저니 맨은 투수인 야구선수이군요. 화려한 스타 선수가 있다면 그 뒤에는 명암과 같은 존재가 있기 마련입니다. 다른 팀으로 옮기는 ‘그’의 감정이 문장마다 쓸쓸하게 배여 있는 건, 플랫폼에 서 있는 그에게서 우리네 인생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 한때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호시절이 지나고 아득히 저물어가고 있다면, ‘팔이 살짝 떨리는’ 이 울림은 당신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한 편의 잘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생생해서, 기억 밖으로 여행을 떠난 이름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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