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가방 - 유미애

2011.01.04 09:39

윤성택 조회 수:711 추천:80


《손톱》/  유미애 (2004년 『시인세계』로 등단) / 《시인세계시인선 제3의 詩》 21

        가방

        한 사내가 가방 속을 걸어 나와
        길 안으로 사라졌다
        이 낡은 여행가방, 서른과 스물
        끝없이 발걸음을 떼어야 하는 마흔에도
        옆구리에 단정히 붙어 있었다
        가방으로부터 해방된 저녁
        정거장엔 버스를 기다리는 추억들이
        어둠과 부딪치며 소스라치곤 했다 가방 속
        손거울로 과거를 비추어보려 했지만
        좀처럼 가방은 입을 열지 않았다
        위경련에 시달린 날, 거리에는 입 벌린
        눈 번뜩이는 무수한 가방들이 보인다
        그럴 때면, 늑골 속
        단단하게 굳어진 길 하나가 만져진다
        뚜벅뚜벅 누군가 다시 가방으로 들어간다
        곧 문이 닫히고
        그를 둘러싼 촘촘한 길들이 일제히 지워졌다
        머리맡에 잠든, 수없이 눈물로 채우고
        엎지른 적이 있는 가방


[감상]

도시인에게 가방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도구입니다. 학교나 직장을 생각해볼 때 가방은 그 무게만큼 삶이 저울질 되기도 합니다. 싫든 좋든 간에 가방은 그렇게 사람을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합니다. 이 시는 그런 시각에서 ‘가방’ 자체를 몸의 일부로 은유합니다. 옆구리에 아예 붙어 있는 가방, 나의 가방과 타인의 가방 속이 다르듯 이제 가방은 하나의 인격체로서 밖으로 나오거나 스스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사람이 떠나도 가방이 남아 그를 증명하듯, 이제 ‘한 사내가 가방 속을 걸어 나와/ 길 안으로 사라졌다’ 해도 신기한 일은 아닙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51 목수의 노래 - 임영조 2002.12.06 949 167
1150 1월의 폭설 - 홍신선 2003.02.06 949 182
1149 자폐, 고요하고 고요한 - 최을원 2009.12.15 949 129
1148 황실대중사우나 - 전윤호 2002.12.10 950 191
1147 무너진 다리 - 송재학 2003.01.02 950 170
1146 로컬 버스 - 김소연 2010.01.19 952 113
1145 뻘 - 유지소 2002.12.13 954 161
1144 빗방울 화석 - 배한봉 2003.01.07 954 168
1143 누와르론(論) - 박수서 2003.08.07 954 149
1142 붉은 염전 - 김평엽 2009.12.10 954 131
1141 푸르른 소멸·40 [즐거운 놀이] - 박제영 [1] 2002.11.14 955 172
1140 불찰에 관한 어떤 기록 - 여태천 2003.07.01 955 201
1139 밤 막차는 왜 동쪽으로 달리는가 - 김추인 2003.10.21 958 156
1138 산란 - 정용기 2003.08.01 961 167
1137 낯선 길에서 민박에 들다 - 염창권 2003.05.16 962 161
1136 묵음의(默音) 나날들 - 은 빈 2003.02.12 964 158
1135 낙마 메시지 - 김다비 2003.06.09 970 176
1134 철자법 - 문인수 2003.05.15 972 166
1133 늙은 정미소 앞을 지나며 - 안도현 2003.04.21 976 155
1132 피라미와 피라미드 - 이승하 2003.07.07 977 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