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물전에서/ 고경숙/ 2001 『시현실』 등단
어물전에서
질퍽이는 바닥을 피해 어물전에 들어섰다
작은 수족관 속에서 대게 몇 마리 서로 발이 엉켜 뒤틀고 있다
양푼 속에선 바지락조개들 간간이 물을 뿜으며 철없이 놀고
주인 아지메가 남은 생태 몇 마리를 떨이로 넘기려는지
무지막지한 꼬챙이로 아가미를 찍어 벌린다
이보요, 빨갛지. 눈깔은 또 어떻고...
말간 생태 두 눈에 피가 맺혀있다
어린놈이다
떡판처럼 우직한 통나무 위에 찍어둔 시퍼런 칼날
단연 이 어물전의 실세지만
난자 당한 도마를 씻느라 바가지 가득 물을 끼얹을 때마다
파도소리를 듣는다
미끈한 갈치도 고등어도 약간 물 간 오징어도
그 소리를 들었다
더 큰놈은 없소?
주인은 들은 체도 안하고 한 마리 더 얹어준다는 걸쭉한 호객뿐,
그래도 팔다 남은 놈 있으면 배 갈라 쫙쫙 소금 뿌려
자반으로 넘긴다
차양너머로 금빛 노을이 파장을 부를 때쯤
사람들은 우루루 기다렸다 모여들고,
동물이나 사람이나 마주보고 탐색전을 벌이다
저 같은 놈 만나 끼리끼리 어울리듯이
너희에겐 그게 딱이야!
작은 이 시장에 불문율 하나 슬픔처럼 내 걸린다
돌아오는 길
생선가게 뿌연 TV속에서
수많은 갈치 고등어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비린내나는 대선후보들의 논쟁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주인여자가 껌을 질겅이며 돈을 세고 있었다
[감상]
시가 절실해지려면 이렇듯 꼼꼼한 시선으로 삶의 한 정점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어물전 풍경을 이처럼 실감나게 묘사할 수 있는 것도 필시, 시인의 치열함이 함께 했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마지막 두 행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묘사만으로도 강한 메타포를 제공합니다. 마무리가 참 인상적인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