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발가락과 마주치다」/ 김사인/ 『문학동네』2002년 겨울호
새끼발가락과 마주치다
스타킹 속에 든 그 새끼발가락을 우연히 보게 된 순간, 나는 술이 번쩍 깼다. 숨죽이고 눈 내리깐 채 몸
의 제일 후미진 구석에 엎드려 있는 그것은 백만 년 인류사 규모의 배경을 갖는 것이어서, 애잔하다거나
안쓰럽다거나 하는 따위의 감상적 형용으로는 감히 어리댈 수도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의 굶주린 아이들
과 유고 내전의 성폭행들과 정신대 끌려갔던 내 재당숙모까지, 온갖 유구한 상처의 넋들이 그 숨마저 죽
인 다소곳함 속에는 서려있다고 내겐 보였다.
그래서 한순간 그토록 꼬부리고 숨어 있는 그것이 혹 죽은 것은 아닌가 걱정되어 나도 모르게 손이 뻗
어가 그것을 건드리니,
아아, 가만히 움츠리며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 기척이 어쩐지 우리들 희망의 절망적인 상징처럼 여겨져서 나는 눈물까지 핑 돌았다. 등을 보이고
앉은 그녀는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발을 조금 당기고 치맛자락을 끌어내려 그것을 슬며시 덮
고 마는 것이었다.
[감상]
이 시는 존재하지만 아득히 소외되어온 여인의 새끼발가락을 통해 역사적 사회적 여성의 의미를 되새김시킵니다. '가만히 움츠리며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로 접근하는 딴청은 주제를 부각하는 탁월한 솜씨입니다. 애인의 새끼발가락은 못생겼습니다. 높은 굽이어야만 하는 시대의 요구가 저리 웅크리게 했을까하는 처량함을, 지난 여름 어느 냇가에서 보았었습니다. 그때 무심코 '발가락 봐라!' 건넸던 농담이 미안해집니다. 왜 매번 털털한 운동화를 신고 깡충깡충 내게로 왔는지 새삼 알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