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12월 - 강성은

2005.10.26 16:24

윤성택 조회 수:2073 추천:240

〈12월〉/ 강성은/ 《문학동네》 2005년 신인당선작 中


        12월

        씹던 바람을 벽에 붙여놓고
        돌아서자 겨울이다
        이른 눈이 내리자
        취한 구름이 엉덩이를 내놓고 다녔다
        잠들 때마다 아홉 가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날 버린 애인들을 하나씩 요리했다
        그런 날이면 변기 위에서 오래 양치질을 했다
        아침마다 가위로 잘라내도
        상처 없이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자라나 있었다
        휴일에는 검은 안경을 쓴 남자가 검은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
        동네 영화관에서 잠들었다
        지루한 눈물이 반성도 없이 자꾸만 태어났다
        종종 지붕 위에서 길을 잃었다
        텅 빈 테라스에서 달과 체스를 두었다
        흑백이었다 무성영화였다
        다시 눈이 내렸다
        턴테이블 위에 걸어둔 무의식이 입 안에 독을 품고
        벽장에서 뛰쳐나온 앨범이 칼을 들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숨죽이고 있던 어둠이 미끄러져 내렸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음악이
        남극의 해처럼 게으르게 얼음을 녹이려 애썼다
        달력을 떼어 죽은 숫자들을 말아 피웠다
        뿌연 햇빛이 자욱하게 피어올랐지만
        아무것도 녹진 않았다


[감상]
<12월>이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정조가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각기 다른 색깔과 재질을 가진 텍스타일을 이어붙여 만든 조각보처럼 보인다. 이 보자기의 각각의 조각들은 시를 쓴 사람의 교묘한 바느질에 의해, 시적으로 변용된다>라는 심사평이 있군요. 다시 말해 이 시는 예측 가능한 일상적 어법을 기술적으로 빗겨가며, 그 사이의 긴장을 극대화시킨다고 할까요. 이러한 표현이 주관적이면 주관적일수록 개성이 돌출되겠지요. 더불어 일상적인 것들을 부정하는 추동력은 새로움에 대한 열망이겠다 싶고요. 비단 이 시가 기존의 방식을 극복하려는 단순한 언어 조립은 아닐 터입니다. 보편성 없는 개인적 상징이 초현대성으로 자리바꿈되는 것도 아닐 것이고요. 깔끔한 추상 유화처럼 불온한 청춘이 <12월>에 걸려 있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31 개심사 거울못 - 손정순 2002.11.04 978 170
1130 새끼발가락과 마주치다 - 김사인 2003.02.05 983 169
1129 바람분교 - 한승태 2002.12.04 984 179
1128 내외 - 윤성학 2003.06.23 985 169
1127 한천로 4블럭 - 김성수 2003.03.05 988 202
1126 만리동 미용실 - 김윤희 2003.05.20 990 164
1125 폭주족의 고백 - 장승진 [1] 2009.02.12 992 111
1124 사유하는 텔레비전 - 우대식 2004.01.05 993 210
1123 해바라기 - 신현정 2009.11.13 998 118
1122 바닷가 사진관 - 서동인 2003.11.01 999 183
1121 바코드, 자동판매기 - 이영수 2002.05.21 1000 178
1120 무덤생각 - 김용삼 2003.01.23 1000 223
1119 못을 박다가 - 신현복 2009.12.07 1003 112
1118 목단꽃 이불 - 손순미 2003.04.15 1004 149
1117 산란2 - 최하연 2003.11.27 1004 178
1116 부리와 뿌리 - 김명철 [1] 2011.01.31 1004 109
1115 어물전에서 - 고경숙 2002.11.19 1005 180
1114 영자야 6, 수족관 낙지 - 이기와 2002.06.03 1007 182
1113 다대포 일몰 - 최영철 2002.06.26 1007 180
1112 공사장엔 동백나무 숲 - 임 슬 [1] 2002.11.07 1007 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