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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처럼 - 김충규

2006.07.13 13:31

윤성택 조회 수:1749 추천:236

《물위에 찍힌 발자국》 / 김충규/ 《실천문학》시인선


        나귀처럼

        나무들의 고요한 노래 사이로
        일몰이 나귀처럼 걸어간다
        달을 맞이하기 위하여
        나무들은 하나같이 다소곳해져 있고
        온몸이 흉터인 바람이
        그들의 머리칼을 흩뜨리며 사라진다
        달이 부어주는 술을 받아 마시기 위하여
        나무들의 모든 입술은
        간절하게 떨림을 견디고 있다
        한 무리의 물고기가 숲에 머물다가 흩어진 것같이
        이파리들은 비늘처럼 몹시 뒤척거린다
        내게 이런 은빛 나는 세월이 있었던가
        비늘을 벗겨낸 듯한 칙칙한 세월만 머물렀을 뿐
        내 청춘은 얼마나 무수히 입술을 깨물며
        세상이라는 딱딱한 숲에서 방황했던가
        나귀처럼 네발짐승이 되고 싶어
        땅에 엎드려 보는 일은 또 얼마나 측은한가
        나는 내 지친 영혼이 간결해지기를 원하며
        나귀처럼 네 발로 걸어간다


[감상]
숲속 나무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휘영청 달 밝은 밤 잎들의 흔들림이 <간절하게 떨림을> 견딘다는 것도 이채롭고, 물고기 <비늘>로 이어지는 달빛 묻은 잎새의 풍경도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이 시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 <나귀>의 등장입니다. 우리가 아는 나귀는 짐 싣고 먼 길을 함께 가는 말과의 짐승입니다만, 이 시에서는 자연의 순리를 실천하는 상징으로 쓰입니다. <일몰이 나귀처럼 걸어>가듯 기꺼이 네발짐승을 자처하는 시인의 결연함에 숙연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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