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아직은 꽃 피울 때 - 하정임

2004.08.19 16:31

윤성택 조회 수:1792 추천:197


「아직은 꽃 피울 때 / 하정임/ 2004년《시인세계》신인당선작 中


        아직은 꽃 피울 때        
        
        막을 길이 없다
        무더기로 벌어지는 꽃들의 붉은 말이며
        저 팔짱을 끼고 피어나는 개나리의 섣부른 외출이며
        서로 몸 섞으며 둥글어지는 거친 자갈들의 울음이며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흐르는 강물들의 조바심이며
        아직 깨어나지 못한 번데기 속 나비 날개의 분주함이며
        비를 내린다고 하늘을 쑤셔대는 새들의 상처난 부리며
        아카시 등걸 사이로 새 집을 짓는 개미턱의 연약함이며
        
        막을 길이 없는 것들아
        빈방 주인을 기다리는 먼지의 애절함같은 것들아
        사랑하는 애인의 속눈썹 위에서 떨고 있는 것들아
        아직은 꽃 피울 때
        아침에는 눈 내리고 저녁에는 봄비 상처난 부리 닦아준다


[감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자연의 움직임들을 이 시는 카메라와 같은 눈으로 포착해냅니다. '자갈'의 거친 면을 '몸 섞으면 둥글어'진다는 발상도 그렇고, '비 내린다고 하늘을 쑤셔대는 새들의 상처난 부리'가 그렇습니다. 객관적 위치에서 오랫동안 앵글을 움직이지 않고 들여다본 인과의 발견이랄까요. 결국 '막을 길이 없다'는 부정형은 '아직은 꽃 피울' 수 있다는 강한 긍정으로 희망적 결말을 도출해냅니다. 당선소감처럼 '말할 수 없음으로 말해야 하는 그 사이'에 늘 詩가 깃들길 기대해 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51 가방, 혹은 여자 - 마경덕 [2] 2005.12.10 1785 217
150 벽 - 유문호 [1] 2006.04.25 1786 219
149 겨울 모스크바 편지 - 김성대 [1] 2011.02.11 1789 128
148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 김경주 [1] 2006.08.17 1791 196
» 아직은 꽃 피울 때 - 하정임 2004.08.19 1792 197
146 첫사랑 - 진은영 [2] 2001.09.11 1794 190
145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 최금진 2001.12.03 1795 207
144 제기동 블루스·1 - 강연호 [2] 2001.04.10 1801 283
143 민들레 - 이윤학 2001.06.13 1803 285
142 선풍기 - 조정 [1] 2005.01.25 1807 178
141 오래전에 잊은 이의 눈썹 - 허수경 [2] 2011.03.15 1813 146
140 뒤란의 봄 - 박후기 [1] 2006.04.01 1820 233
139 오늘 당신을 만난 데자뷰 - 박선경 2006.01.11 1824 255
138 남해 유자를 주무르면 - 김영남 2011.04.06 1824 160
137 저무는 풍경 - 박이화 [1] 2006.05.02 1825 208
136 아침의 시작 - 강 정 [1] 2007.04.17 1825 164
135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 김중식 [1] 2001.05.02 1826 278
134 별이 빛나는 밤에 - 장만호 2008.11.26 1829 128
133 당신은 - 김언 [1] 2008.05.26 1837 162
132 사랑니 - 고두현 [1] 2001.07.11 1841 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