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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문장 - 김태형

2008.08.01 17:04

윤성택 조회 수:1432 추천:119

「늑대의 문장」 / 김태형 (19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 《현대시학》2008년 5월호


  늑대의 문장


  무리지어 다니지 않는 늑대는 그래서 외롭지 않다

  1
  나와 저만치 앞서 가는 늑대 사이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내 걸음은 늑대 발자국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힘겨웠지만
  가끔씩 제자리를 오가는 검은 구름의 한때를 보기도 했다

  구름과 나는 같은 지평선을 갖고 있지 않다

  간혹 돌아올 수 없는 곳이라는 이름에 사로잡힌 이들이 있다 사라진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이었던가

  나는 그런 것들에 바쳐졌다

  이상하게도 내가 따르던 발자국은 잔물결처럼 일렁이고 내가 발을 맞추며 지나치면 이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십여 년 동안 모래의 문자를 흩어놓으며 내가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사라져 보이지 않는 발자국을 길 위에 새기는 일

  단 한 번도 나를 허구로 만들 수 있는 문법은 허락되지 않았다


  2
  저기 또 한 사람이 모래로 무너져내린다

  그는 어디를 뒤돌아보았던 것일까

  나는 저녁에 누군가 모래로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늑대 발자국을 놓치고 말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늑대를 따라가다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나를 잃어버렸다
  제 몸에 늑대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마법의 세계는 검은 휘장 속으로 사라졌다

  붉은 눈썹이 그려지는 저녁 속으로 모래 한 줌 흩뿌려 다시 첫 문장을 얻어라

  이제 막 피 냄새를 맡은 늑대 한 마리가 느릿느릿 걸어들어간 곳을 나는 본다

  늑대가 뒤를 돌아본다


[감상]
다큐멘터리에서 보면 늑대는 종종 경외감으로 비춰지곤 합니다. 주위를 살피는 형형한 눈, 설핏 비치는 송곳니를 생각하다보면 척박한 초원에서의 생존을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이 시는 늑대를 관찰하는 시선으로 독자를 끌어들입니다. 왜 늑대를 쫓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늑대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긴장감만이 팽팽하게 여백의 행간을 가를 뿐입니다. 문학은 이성이 신봉하는 신화와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병약한 문명사회에서 이성이 얼마나 나약한가를 스스로를 통해 느끼곤 합니다. ‘늑대의 문장’은 이렇듯 규격화되고 상상력이 거세된 현실을 일깨워주는 방식으로 써내려갑니다. 사흘 밤낮을 웅크리며 오직 때를 기다리는 늑대의 눈빛! 단 한 번의 결단으로 먹잇감을 채는 그 야성은 어쩌면 시인에게 필요한 본능은 아니었을까… 마지막 행에서 온몸의 잔털을 곧추서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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