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편지 - 이성복

2001.08.09 11:51

윤성택 조회 수:2481 추천:271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이성복 / 문학과지성사





        편지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 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記憶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서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감상]
편지를 부쳐도 오늘 안으로 당신은 볼 수 없습니다. 꼭 이 편지를 당신에게 오늘 안으로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해줄 방법이 없습니다. 편지란 사나흘의 여운으로 배달되는 것이기에, 결정적으로 오늘 편지를 쓴다 하더라도 그 편지는 사나흘 후의 목소리가 됩니다. 그러니 "그리운 당신…… 빌어먹을"만 하지 않을까. 이 속에는 두 개의 자아가 있는데, 이 두 자아가 어우러지며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인상적인 부분은 "그리운 당신...... 빌어먹을,"이나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과 같은 표현들입니다. 자조적으로 발설되는 목소리가 역설적이게 더욱 그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메일이나 손전화로 가능한 요즘의 소통이, 때론 그리움을 반감시키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31 어느 가난한 섹스에 대한 기억 - 김나영 2006.07.04 2417 236
30 가을에는 - 최영미 [3] 2001.08.31 2431 235
29 꽃들에게 묻는다 - 채풍묵 [1] 2008.04.01 2436 187
28 2006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1] 2006.01.02 2454 270
27 사랑 - 김요일 2011.04.04 2461 158
26 세월의 변명 - 조숙향 [1] 2001.04.09 2479 273
» 편지 - 이성복 2001.08.09 2481 271
24 나는 기억하고 있다 - 최승자 2010.02.18 2487 192
23 눈을 감으면 - 김점용 [1] 2011.01.22 2491 113
22 낙엽 - 이성목 [2] 2005.11.10 2520 228
21 첫 키스 - 함기석 [3] 2008.04.08 2527 192
20 우체통 - 이진명 2001.04.11 2538 334
19 이별 - 정양 2006.03.02 2542 287
18 유리꽃 - 이인철 2006.04.03 2589 253
17 그물을 깁는 노인 - 김혜경 [1] 2001.04.09 2631 306
16 싹 - 김지혜 2005.12.27 2666 266
15 고백 - 정병근 [1] 2005.08.17 2711 250
14 가을산 - 안도현 2001.09.27 2815 286
13 별 - 김완하 2002.08.12 2923 249
12 사랑은 - 이승희 2006.02.21 2977 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