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대/ 최리을/ 『세계문학』2002년 봄호
건조대
이곳에서의 삶은 무미건조했다
건들바람에 흔들리는
한 장의
작약꽃무늬 손수건,
나비가 찾아온 적도
벌이 날아온 적도 없었던
부드러운 햇빛 속
소금과 눈물과 피는 어디에 쌓여 있는가
그림자만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길게 늘어지는 풍경을 거느리는 저녁
어스름에 젖어드는
작약꽃무늬 손수건
묵은 햇살 냄새 묻어나올 듯
너무도 얇은
누구의 전생 같은
그리고
텅 빈 건조대에 밤이 내린다
[감상]
건조대에 "작약꽃무늬 손수건"이 널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의 앵글은 그 손수건에 아침부터 해거름 저녁까지 오래도록 머뭅니다. 그런 잔잔한 풍경 속에서 이 시는 "벌"과 "나비"를 그리고 "전생"을 생각해냅니다. 자꾸 읽어볼수록 맛과 깊이가 우러나는 나는 시로군요. 솔직해서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