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 이민하/ 『리토피아』겨울호(2002).
배꼽
- 관계에 대한 고집
꽃병에서 눈을 뜨는 여자
꽃병에서 머리가 반쯤 돋아난 여자
꽃병에서 목이 쑥쑥 길어지는 여자
꽃병에서 녹색 벽돌을 나르는 여자
꽃병에서 아이 한 채를 짓는 여자
소리 지르며 소리 지르며 모락모락 김이 나는 여자
아이의 배꼽에 호스를 끼우는 여자
부푸는 아이 몸에 미래를 주입하는 여자
그 여자의 체액을 빨아먹는 아이
그 여자의 미소를 찢어먹는 아이
그 여자의 가시를 발라먹는 아이
그 여자의 눈을 사탕 막대기에 꽂는 아이
그 여자의 뇌에 불을 지르는 아이
불 지르며 불 지르며 무럭무럭 크는 아이
여자의 배꼽에 호스를 끼우는 아이
헐거워진 여자 몸에 기억을 주입하는 아이
아이의 배꼽에서 여자가 주름투성이 손을 내민다
여자의 배꼽에서 아이가 털복숭이 앞발을 내민다
[감상]
언젠가 보았던 태아의 사진이 떠오릅니다. 탯줄에 달려 곤충 모양에서 양서류로 포유류로 몇 만 년 전부터 이어온 진화를 단 10개월에 이뤄내는 자궁 속 태아의 사진. 이 시는 '여자'와 '아이'라는 두 시적 대상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심리가 뛰어납니다. '배꼽'에 호스를 꽂고 주입한다는 상상력은 반복효과와 맞물려 섬뜩한 감동을 전해줍니다. 아이가 왜 핏줄인지 새삼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