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약」/ 백인덕 / 『현대시』2003년 8월호
오래된 약
비 오다 잠깐 깬 틈
책장 사이 수북한 먼지를 털자
어디다 쓰는지 알 수 없는
알약 몇 개 떨어진다
언제,
어디가 아팠던가? 무심한
손길이 쓰레기통 뚜껑을 열자
스멀대며 퍼지는 통증 한 줄기.
약은 몸에 버려야 제 격,
마른침으로 헌 약을 삼켜버린다
그 약에 맞춰 몹쓸 병이나 키우면
또 한 계절이 붉게 스러지리.
[감상]
'약은 몸에 버려야 제 격' 이 부분을 오래 들여다봅니다. 몸을 살리기 위해 약을 먹어야 이치일 터인데, 몸 또한 쓰레기통으로 바꿔내는 통찰이 좋습니다. 더 나아가 약에 맞춰 몹쓸 병을 키웠다니요. 약으로 인해 몸은 아픔의 내성을 가질 것입니다. 그렇게 아팠던 기억, 혹은 사랑이 아팠던 기억은 또 얼마나 알약으로 점철된 것일까요. 오래된 알약을 먹음으로서 그 계절로 돌아갈 것처럼.